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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08/23 23:12:40
Name 솔로몬의악몽
Subject 아주 소소하게 누군가의 히어로가 되었던 이야기
월요일에 지방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담배를 한 대 태우고 계단 앞에 서서 풍경을 잠깐 바라보다 지하철을 타러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뒤에서 약간은 어색한 목소리의 '오빠!'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 날 오빠라 부를 사람은 제 여동생 뿐입니다. 저도 잘 알지요.
하지만 인간이란 부질없는 희망을 놓지 못하고 사는 법이며, 저도 그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고 뒤돌아봤습니다.

근데 그 여자분이 정말로 절 보고 있더군요.
뭔 일이지?라고 생각하며 그 분을 자세히 보니 다소 이질감이 듭니다.
'아 베트남 사람이구나'
베트남 여성이 절 오빠라 부르며 세울 이유에 대해서 순간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긍정적인 이유는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여행중에 돈을 잃어버렸으니 돈을 좀 달라고 하거나 더 안좋으면 국제 성매매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틈을 봐 도망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근데 뭔가 한국말로 말하려 하더니 저보고 영어 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약간 한다고 얘길하니 말을 하는게 자기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어디로 가야하지 모르겠다는겁니다.
이 철학적인 선문답에 '신흥종교의 가능성을 생각치 못했었구먼'이라고 제 자신의 상상력 부족을 자책하고 있는데 자신의 핸드폰에서 이미지를 하나 불러옵니다.
보니 한국 핸드폰 번호를 가르킵니다.
이 사람이 알고 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합니다.
아 전화를 해달라는 말이구나.

생각해보면 베트남은 한국보다 더 호칭이 복잡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손하게 남자를 부르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오빠라 불렀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베트남 출장 중에 식당에서 직원을 에머이라고 불렀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제 전화기를 들어 그 여성이 가르키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상대방은 한국어를 할 수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 여성의 영어 악센트를 들어본 결과 상대방 베트남인의 한국어를 이해할 자신도 없고, 또 불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스피커폰으로 전환했습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신호는 가지만 받지는 않습니다.
받지 않네요라 말하는 여자분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지나갑니다.

결국 받지 않고 여자분이 낙담하는 찰나에 지체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습니다. 상대방도 그럴 수도 있습니다. 라고...생각만 했습니다.
근거 없는 희망은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긴 영어를 어색하지 않게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달칵
상대방이 받았습니다.
상대방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선수칩니다.
여보세요? 제가 지금 베트남 여성분과 함께 있는데 통화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맞습니다. 전 상대방의 한국어를 이해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성분에게 공을 넘겼습니다. 통화 시켜주면 제 할일은 다 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뭔가 통화를 하더니 여자분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통화를 끝내더니 자신이 가야할 곳을 다시 자신의 핸드폰에 이미지를 띄워 보여줍니다.
donghwa라고 적혀있습니다.

동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구글에 검색해봤으나 어린이 동화만 나올 뿐입니다.
동화 관광지로 검색을 해봐도 마땅한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미안 더 이상은 모르겠다고 하니, 여자분도 괜찮다고 고맙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근데 이쯤되면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 여성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한국어 실력과, 베트남 억양이 가득한 영어 실력, 그리고 한국 택시 운전 기사의 평균적인 영어 회화 능력 예상치, 서울에서 근 40년을 살았어도 들어본 적도 없는 동화라는 지명의 조합을 생각해볼 때, 그녀가 택시를 타고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는 확률은 제가 올해 안에 결혼할 수 있을 확률과 비슷해보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잠시 서서 생각을 해보다 반은 자포자기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구글에 donghwa라고 검색해봅니다.
그럴듯한게 나왔습니다.
donghwa duty free

계단을 뛰어 내려갑니다.
후다닥 달려가보니 그 여성분이 택시를 세워 문을 열고 대화를 하는게 보입니다.
그 여성분이 타고 출발하면 모른척 돌아가고, 못타면 도와주기로 합니다.
그 순간 택시 기사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손을 훼훼 젓는 제스쳐가 보입니다.
아니 탈 수 있을 리가 없다니까요.

그 여자분이 포기하고 택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뒤에서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헤이! 미스!
놀라서 뒤 돌아 보는 여성분에게 제 핸드폰을 보여주며 가고 싶은 곳이 여기 맞냐고 물었습니다.
예스! 예스! 동화 듀티 프리!
처음부터 듀티 프리라고 말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택시 기사에게 (여성분이 최소한 동화라는 단어는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동화 면세점 아세요? 라고 묻습니다.
기사분도 뭔가 살았다는 눈빛으로 네 압니다! 라고 답합니다.

오케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조수석에 타려고합니다.
아...여성의 소지품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군요. 트렁크를 품에 안고 말입니다.
어지간히 당황했었나보구만...이라고 생각하며 택시 기사에게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눈을 보고 차의 뒷쪽으로 손가락질 했습니다.
트렁크가 달칵하고 열리고 제가 트렁크를 열어줬습니다.
여성이 트렁크를 차량 트렁크에 집어넣습니다.
남녀의 역할이 반대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제 한 손에는 핸드폰이, 다른 한손은 차 트렁크 뚜껑을 잡고 있습니다. 에이 이 정도면 해줄만큼 해줬습니다.
트렁크 위치를 조정해주자 그녀가 고맙다고 고맙다고 계속 말합니다.
전 왠지 쑥쓰럽기도 하여 눈도 마주치치 않고 이츠 오케이! 이츠 오케이! 라고 말하며 여성분을 조수석에 태워 보냈습니다.

그 다음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분은 잘 도착했겠죠. 그리고 쇼핑도 잘 했겠죠. 가능하다면 한국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을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이 있었다는 좋은 추억도 받아갔다면 더욱 좋겠네요.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었습니다. 근데 왠지 모르게 나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자랑하고 싶었는데 자랑할 곳이 별로 없더군요. 시간 남으시면 제 자랑 좀 듣고 가시죠. 뭐 여기까지 온 이상 이미 늦었지만요. :)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22 11:3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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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고양이
17/08/23 23:20
수정 아이콘
요즘은 낯선 사람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기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어버렸죠.. 글쓴이님의 친절을 칭찬합니다.
웨인루구니
17/08/23 23:20
수정 아이콘
영웅이시여. 제 인생에도 도움 좀 주시렵니까.
17/08/23 23:31
수정 아이콘
소소하지 않네요. 큰 일 하셨습니다. 오늘은 악몽말고 좋은 꿈 꾸실거예요~~~ ^^
스테비아
17/08/23 23:32
수정 아이콘
이런건 추천 두 번 하고 싶네요!!
17/08/23 23:36
수정 아이콘
서울이라는 도시가 잠깐은 따뜻해졌네요.
John Doe
17/08/23 23:37
수정 아이콘
훌륭하십니다!
이런 일상 속의 영웅담은 볼 때마다 즐겁고 기분이 좋고 그러네요.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17/08/23 23:40
수정 아이콘
좋은일 하셨네요
항즐이
17/08/23 23:40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한 장면이네요.
저도 어느 밤 신사역 사거리에서 반드시 모델일 수 밖에 없는 아우라를 가진 금발미녀 두 명에게 같은 호의를 베풀 기회가 있었습니다.

"Is there any McDonald near here?"

'어.. 이건 동구권 액센트인가?.. 영어를 잘 못하시겠구나. 아마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그냥 편하게 끼니를 때우려는 거겠군. 밤도 깊었고 그러니 마음이 급하겠지. 하지만 강남이라면 온갖 음식이 다 있는데, 뭘 원하는지만 알면 훨씬 좋은 한국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을거야. 약간 귀찮지만, 그래.'

"Well, I have no idea."

단호한 저의 결론에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당황을 감추지 못한 그녀들은 아쉽게 사라져갔습니다.





미안해, 아내가 옆에 있었어..
파핀폐인
17/08/24 11:17
수정 아이콘
Aㅏ....ㅠㅠ
지니팅커벨여행
17/08/24 11:43
수정 아이콘
아... ㅠㅠ
저글링앞다리
17/08/23 23:42
수정 아이콘
이렇게 마음이 따듯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자랑은 언제든 환영이죠!
조용히 추천하고 가려다가 칭찬 한마디 덧붙이고 갑니다.
참 잘하셨어요! 도장 꽝!!
블루투스 너마저
17/08/23 23:46
수정 아이콘
아주 잘 하셨습니다. 20여년 전 제가 처음 유럽에 여행이라는 걸 갔을 때, 밤이 어두워 오는데 히드로 공항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할 지 몰라 헤메고 있을 때 저를 도와준 일본 처자, 20년 넘었는데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베트남 여성분도 "Pay it foward" 하실 겁니다.
-안군-
17/08/23 23:50
수정 아이콘
외국에 나가서 갈길을 잃었을 때의 막막함이란 진짜...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어서 크게 공감되네요.
엄청 큰 일 하신겁니다!! 영웅 맞아요. 자부심을 가지세요.
서연아빠
17/08/24 00:10
수정 아이콘
그분에겐 한국이 정말 친절한나라라고 느꼈을겁니다. 국위선양하신거예요!!
17/08/24 00:20
수정 아이콘
근래에 들은 얘기들 중 가장 멋진 일화네요.
좋은 일 하셨습니다~!
17/08/24 03:27
수정 아이콘
역시 검색은 구글이죠!
우리엘
17/08/24 04:25
수정 아이콘
좋은 일 하셨어요!!
새강이
17/08/24 07:01
수정 아이콘
짝짝짝 잘하셨어요
둥실둥실두둥실
17/08/24 09:08
수정 아이콘
아침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호에에에에엥.
17/08/24 09:25
수정 아이콘
이런게 국격 상승이죠!
켈로그김
17/08/24 09:36
수정 아이콘
좋은 일 하셨습니다 흐흐;;
소르바스의 약속
17/08/24 10:12
수정 아이콘
저도 약간 하위버전같은 경험이 있는데..
10여년 전에 부산의 한 한적한 지하철역에서 한 여성분이 불안한 얼굴로 뭐라고 말을 거는데 중국어인거 같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수가 없어서 제가 유일하게 하는 영어 캔유 스픽 잉글리쉬? 를 날렸는데
다행스럽게도(!) 영어도 전혀 못하시더군요.
대신에 그분이 내민 쪽지에 쓰인 전화번호로 전화했더니 어눌한 한국어를 하시는 분이 받으셔서
통화하면서 그 분 길을 찾아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버디홀리
17/08/24 10:16
수정 아이콘
히어로...맞습니다!
유부초밥
17/08/24 10:18
수정 아이콘
좋은일 하셨네요 그 베트남 여성은 솔로몬의악몽님 덕분에 한국에 대한 기억이 더 좋아졌을겁니다.
현실파악
17/08/24 10:56
수정 아이콘
칭찬칭찬
BessaR3a
17/08/24 11:50
수정 아이콘
대구 동화사로 가셨어야죠..
멀할까나
17/08/24 11:58
수정 아이콘
칭찬칭찬~~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
빨간당근
17/08/24 13:00
수정 아이콘
좋은 일 하셨습니다~
칭찬!
미네랄배달
17/08/24 13:24
수정 아이콘
역시 검색은 구글이죠(2)
StayAway
17/08/24 16:33
수정 아이콘
설마 이 글도 google 바이럴 아니냐고 하는 분이 있을까봐 걱정이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17/08/24 19:27
수정 아이콘
고등학교때 일인데 ..

그날 과천(고교 소재지) 지역에 무슨 도로에서 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뭔 축제였나 그랬어요.
평소엔 버스로 통학했지만 그날은 도로를 통제하니 별 수 없이 전철로 ..
당연히 지하철안은 미어터지고 있었죠.

왠 외국인 둘이 자기들끼리
왜 이리 사람이 많지/다른 차로 갈까 뭐 이런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지금같으면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그때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고교생이였고
왜 그런거 막 시키고 권장하고 그러잖습니까.
지나가다 외국인 보이면 막 말 걸고 손짓발짓 해가면서 그래야 영어 는다고.

그래서 전혀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떠듬떠듬
지금 이동네에 이러이러한 행사를 해서 도로를 사용중이다.
지하철 외 달리 방법도 없을거고 다음 차를 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라고
짧은 어휘력으로 어찌어찌 설명을 했지요.

그러자 그 외국인분들이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하더라구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라고

유창하고 매끄러운 발음의 한국어로 -_-;

..다음역에서 바로 내려서 학교까지 15분 거리 걸어갔습니다.
저도 히어로가 되고 싶었어요 ㅠ_ㅠ
김제피
17/08/25 09:36
수정 아이콘
때로 친절에도 용기가 필요하더군요. 베트남 여성은 아주 어마어마한 화률로 글쓰신 분을 기억할 겁니다. 제가 다 뿌듯합니다. 크크.
보로미어
17/11/27 21:48
수정 아이콘
멋집니다 굿이에요 굿
세인트
17/11/28 13:57
수정 아이콘
뒤늦게 봤는데, 내용도 전개도 마무리까지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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