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긴 글이 요새 잘 안 써지기도 해서 그냥 짦은 유머성 글로 하나 올려봅니다만, 바로 제갈량 관련 이야기 입니다.
제갈량은 삼국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드라마라던지 게임이라던지, 이렇게 저렇게 멋지게 꾸며져 되어 여러모로 소위 "빨만한" 사람들이 훨씬 많아진 지금도 인기있는 인물 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과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민중들대로 제갈량의 여러 신박한 민간설화를 이야기 하면서 "빨고",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역사 평론을 남기며 추켜 세우던, 인기 캐릭터 중의 인기 캐릭터 였습니다.
현지인 중국으로 갈 것도 없이 조선에서도 우리에게도 이름이 친숙한 서포 김만중은 제갈량을 심지어 조선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성인인 공자를 제껴놓고 보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맹자, 주자에까지 견주면서 거기에 비교하며 "아주 살짝 거칠고 미약하긴 해도 다른 순수하지 않는 인물들하고는 급이 다름" 이라고까지 하면서, "'거의' 완전무결"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거의' 라고 한건 '공명 같은 사람도 마속을 쓰는 서투른 짓을 했다.' 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여하간에 이렇게 "빠" 가 많았으니, 자연히 스스로 제 2의 제갈량, 요즘으로 치면 '포스트 제갈량' 을 '자처' 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거의 결말이 안 좋았는데...
중국의 여러 통일 왕조 중, 우리에게 '영웅문' 으로 친숙한 조광윤의 송나라가 막 건국되던 무렵,
아직 중국 땅을 통일 하지 못한 송나라는 촉 지방에 할거하던 정권인 '후촉' 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촉나라에서는 '왕소원' 이라는 인물을 대장으로 삼았으나,
이 왕소원은 출발하기 전부터 술을 마시면서 "내가 바로 지금 시대 제갈량이다. 걱정 마라. 적을 막는건 물론이고 내친김에 중원까지 점령하겠다." 며 큰소리 쳤다가,
3번이나 연거푸 패배하고 검문(검각)으로 달아나 지형을 믿고 버텨보려고 했지만,
거기서도 곧 적에게 넘어갈 지경이 되자 부하 한명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줄행랑 쳐서 민가에 숨어서 눈물을 즐즐 흘려다 잡혔는데,
얼마나 즙만 짰는지 눈이 팅팅 부어서 사람들이 대즙제갈량(帶汁諸葛亮)이라 불려서 고사로 까지 남았다는 슬픈 전설이...
그리고 몇백년 정도 뒤, 남송 무렵 곽예(郭倪)라는 인물 역시 스스로를 제갈량으로 일컫었는데, 이 사람은 한술 더떴습니다.
왕소원은 그래도 그냥 본인이 "나 제갈량 같은 재주가 있다." 의 호언장담이었다면, 곽예는 아예 진짜로 자기가 제갈량이라도 된다고 믿었는지 '코스프레' 를 평소에 하고 다녔습니다.
제갈량 처럼 입고 다니며 행동하고, 심지어 제갈량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지는 백우선까지 들고 다니며, 여기에는 三顾频烦天下计,两朝开济老臣心("초가집 세번찾아 천하 삼분을 논의하고, 대의를 이어 충성한 노신의 충정이여.")라는 두보가 지은 시문까지 써두고 다닐 정도의 중증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대송제갈량' 이라고 자처했다고 하니..
그렇게 그냥 본인이 "빠" 짓만 하고 다녔으면 무탈했겠지만.... 당시 남송에서는 권신 한탁주(韓侂胄)의 주도 하에 '북벌' 정책이 시행 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캬... 북벌!
선황들의 유훈을 받들어, 옛 수도로 돌아가기 위한 전쟁! 한적불양립!
제갈량을 자처하는 남자 답게 당연하게도(?) 곽예 역시 이런 빅 이벤트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심지어 출전하면서 후방 보급을 맡는 장수에게는 "목우유마의 일은 너에게 맡긴다."는 발언까지 하며 출전 했습니다. 결과는? 굳이 뭐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듯.
결국 대패한 후 이제 경력에 스크래치가 제대로 나버린 곽예는 몇백년 전의 왕소원처럼 '즙' 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하객들을 모아놓고 망했다면서 울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그 와중에 부하 직원 한 명이 농짓거리로 "어쨌든 이제보니 제갈량에 물이 섞였네요." 하면서 '즙갈량' 을 언급했고,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폭소, 곽예는 듣고 부아가 올라 거의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마지막 사례로 이야기할 인물은 두 명과는 한참 시대가 떨어진 청나라 시기, 융과다(隆科多)라는 인물입니다. 다만 융과다는 저 두명(...)과 비교하면 미안한 수준의 거물이고, '즙갈량' 처럼 황당한 사례도 아닙니다. 오히려 재수없게 걸려든 경우에 가깝습니다.
융과다는 청나라 황제 옹정제의 최측근이었던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옹정제의 외삼촌 뻘에, 청나라의 보군통령 직을 재수했는데 이 직은 아주 높은 고위직은 아니지만 북경성 내외 구문을 관리하고 팔기의 보병을 통수하는 직이라 황실의 미묘한 권력 다툼에서는 아주 요긴하게 작용할 수 있는 직위였습니다.
옹정제는 아버지인 황제 강희제의 유조를 조작하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다는 음모론이 끊이질 않았던 인물인데,(저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진 않습니다)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조작했다는 걸 믿는 측에서는 바로 이 융과다가 그 역할을 맡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여하간에 그 정도로 옹정제에게 있어선 은혜가 큰 공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제는 워낙에 철두철미하고 변덕이 심한 성격을 가진 독재군주였기에, 이렇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공신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옹정제는 기회를 보다 껀수를 잡고 융과다에게 총 41가지나 되는 온갖 죄목이란 죄목을 가져다 붙여 숙청했습니다.
그 죄목을 분류하면 불경죄 5건, 기만죄 4건, 조정을 문란하게 한 죄 3건, 사악한 당파를 이룬 죄 6건, 불법 행위 7건, 부정 축재 16건에 가장 큰 문제인 옥첩의 사유화, 강희제가 하사한 어서첩을 함부로 보관한 죄 등등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 죄목 목록을 보면 굉장히 기이한 항목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스스로를 제갈량에 견준 오만함에 관한 죄 라는 명목 입니다.
언젠가 융과다가 지나가는 소리로 자신을 제갈량에 견줬던 적이 있었던듯 한데, 그게 "아주 시건방지며 분수를 모르는 짓" 이라는 죄목이 되었습니다. 물론 애초에 숙청하기로 마음 먹고 말도 안되는 걸로 다 엮어넣는 것이라 좀 기괴한 상황이긴 한데, 어찌되었던 이 당시에 "나는 제갈량급인 사람." 이라고 하는건, 황제가 마음 먹으면 "이 놈 아주 건방지니까 처벌해야 겠다." 고 죄로 엮어 넣을 수 있었던 '중죄' 였던 겁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죄목에 엮인 융과다는 처형은 면했지만 세칸 짜리 작은 집에 유폐되어 평생 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외에 근현대 시기에 북방 동삼성의 봉천 군벌인 장작림의 패권을 도왔던 측근 양우정이 지략으로 이름을 날리자 별명이 "양제갈" "작은 제갈량" 같은 말이 있기도 하고... 이 사람도 끝은 안 좋긴 했습니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봉천 군벌의 후계자가 된 이후에 숙청 되어 총살 되었으니....
이렇게 자칭 제갈량도 있었고, 타칭 제갈량도 있었고, 감히 제갈량에 자길 견주냐며 건방지다고 숙청 당한 사람도 있었고...
제갈량의 평가를 떠나서, 매우 인기있고 오랜시간 일종의 대명사로 여겨졌다는 게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