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 21일 김두한은 오랜 지병이었던 고혈압으로 쓰러졌다..."허나 이는 사실과 약간 다르다. 실제로 김두한이 쓰러진 날은 1972년 11월 19일이다.
당시 김두한이 내원한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의 응급실 기록에 의하면 김두한은 11월 19일 갑작스레 두통을 호소하며 구토를 한 뒤 의식저하가 있어 혼수상태로 응급실에 내원했다고 되어있다.
이후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11월 21일 사망했다.
평소에 고혈압이 있었으며 갑작스런 두통 및 구토, 의식저하가 진행된 것으로 보아
뇌출혈로 인한 사망이 강력하게 의심된다
문득 김두한이 사망했던 50년 전의 고혈압 치료는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해서 관련자료를 찾아봤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1972년에는 고혈압의 진단기준 및 치료 지침이 없었다!!
(아니 의사양반 그게 무슨소리요!!)
최초로 고혈압 진단 및 치료 기준을 제시한 JNC (Joint national committee)의 고혈압 가이드라인 JNC-1은 1977년 첫 발표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혈압 진단기준인 수축기혈압/이완기혈압 140/90mmHg도 1993년에야 정립된 기준이다. 윗 표를 잘 살펴보면, 최초의 가이드라인인 JNC-1때만 해도 고혈압 진단기준이 이완기혈압(DBP)이 105이상인 경우였고 수축기혈압에 대한 기준은 아예 없었다...
1984년 JNC-3에 이르러 고혈압 진단기준이 160/90이 되었고 JNC-5(1993)에서는 140/90으로 하향조정되었다.
그럼 1977년 이전까지 고혈압 환자들은 어떤 치료를 받고 있었을까?
(니콜라이 코로트코프와 그가 개발한 수은 혈압계)
1905년. 혈관외과 의사인 니콜라이 코로트코프(Nikolai Korotkoff)는 지금과 같은 수축기/이완기 혈압을 측정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혈압의 객관적 측정이 가능해지자, 혈압이 높으면 건강에 문제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인식이 서서히 생겼다.
하지만 고혈압 치료법이 정립되는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는 당대 의사들의 상당수가 고혈압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몸의 변화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19세기 독일의 의사 루드위그 트라우베(Ludwig Traube)로 그는 해부를 통해 고혈압 환자들의 신장 동맥이 수축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신장에 더 많은 피를 보내기 위해 혈압이 높아진 것이며, 고혈압을 억지로 조절하면 도리어 신장에 피가 돌지 않아 장기 부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트라우베의 주장은 당대 지식인들의 지지에 힘입어 1940년대까지 고혈압을 치료하지 않는 풍조를 낳았다. 1920년대부터 일부 의사들이 혈압이 높은 환자에게 교감신경 절제술을 통해 혈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려하던 장기부전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1928년 미국 보험협회에서 고혈압 환자들이 기대수명이 더 낮다는 통계를 내놓아도 고혈압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좌측부터 처칠, FDR, 강철의 대원수)
고혈압으로 인한 당대 최대 피해자 중 한명이 그 유명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되시겠다. 평소 고혈압이 있었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던 그는 당시 기록에 의하면 평소 혈압이 220/120mmHg까지 측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에게 건강에 별 문제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얄타회담 당시 이미 루즈벨트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어있었다. 당시 윈스턴 처칠의 주치의는 '루즈벨트의 건강이 굉장히 좋지 않아보인다. 동맥경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아마 수 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실제로 회담 2개월 후 루즈벨트는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쓰러졌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사망 직전 혈압이 무려 350/190mmHg까지 측정되었다고 하니 머리 혈관이 고혈압을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즈벨트의 사후 3년이 지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승인된 미국심장협회(United state national heart act)가 출범하였다. 그들은 프래밍험 연구(Framingham study)를 통해 '치료받지 않은 고혈압은 이른 사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연구들의 결과가 속속 나오며 고혈압 치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베타차단제 계열 혈압강하제 propranolol의 개발로 노벨상을 받은 영국의 제임스 블랙)
1947년 펜타퀸을 시작으로, 1950년대에 이르러 하이드랄라진, 레세르핀 등 여러 종류의 약이 고혈압 치료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초창기 약이 그렇듯이 이들은 매우 많은 부작용을 동반하여 환자를 힘들게하였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고혈압 치료에 관한 논쟁이 지속된 주요 이유가 고혈압 치료 약물의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뇨제, 베타 차단제가 고혈압 치료 약물로 등장하며 부작용이 적은 혈압 강하가 가능하게 됐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고혈압은 '약물로 안전하게 조절 가능한' 병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60년대 후반 또 하나의 OP 약물인 칼슘채널차단제가 등장하며 더욱더 다양한 치료가 가능해졌다. 1975년 최초의 안지오텐신전환효소억제제(ACEi), 1986년 안지오텐신수용체차단제(ARB)가 시판되어 현재도 고혈압 치료의 기틀로 자리하고 있다.
(나도 치료를 잘 받았다면ㅜㅜ)
다시 시계를 1972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김두한을 비롯한 한국의 고혈압 환자들이 정확히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60년대에 개발된 이뇨제, 베타차단제 등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972년까지는 명확한 고혈압 치료 지침이 없었기에 현대 사람들의 기준에 맞는 적절한 치료가 이뤄졌을 가능성은 낮다. 김두한의 경우 혈압을 잘 조절했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혈압 강하제, 항생제, 당뇨약 등 현대 의학의 굵직한 발전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뤄졌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적어도 70년 전 미국 대통령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진료 및 치료를 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오늘도 우리의 혈압을 위하여 균형잡힌 식사와 적절한 유산소 운동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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