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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0/06/10 03:17:26
Name 개롱
Subject 연기(Acting)를 배우다
안녕하세요. 피지알 눈팅만 하다가 처음 글을 써보는 20대 입니다.
현재에는 연기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기술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전문대학에 재학중입니다.
그 전에 고등학생때부터 연기 공부를 시작하여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동안 연기 공부를 하며 제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글을 써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력이 썩 좋지 못하여서 글이 방향을 잡지 못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꿈

연기라는 분야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별 거 없었습니다.
학창시절, 꿈에 대해 생각하던 중 짝사랑 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아마 남자인생의 가장 큰 동기부여는 여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너무 아름다워서 제가 감히 사귈 수 없다고 판단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꿈을 뭐로 정했었냐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가 되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만날거야'
가 제 꿈입니다. 물론 아직도 진행형이구요.

그렇게 꿈을 정한 뒤, 구체적 실현을 위해서 좀 더 자문자답을 통해 계획을 설립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했을때 멋있는 남자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을까?'
'나는 배우라는 직업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함. 왜냐하면 그냥 멋있어서'
'그러면 배우라는 직업은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연기를 배워야겠다'

해서 연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16살, 여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입학지원을 했었다가 광탈해버렸지만 말이죠 크크
그렇게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해의 겨울부터 연기학원이라는 곳을 다녀보게 됩니다.
그떄부터 제 인생의 1막이 시작되죠

2. 우는 연기 가르쳐 주냐?

고등학생 1학년 시절, 연기학원에 들어간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니 정말 많이들 궁금해 했습니다.
물론 저도 학원에 가면 어떤 것을 배울지 많이 궁금했지요.
'우는 연기 가르쳐주나?'
'화내는 연기 가르쳐주나?'
등의 생각들 말이죠.

그 당시에 제 성격은 굉~장히 내성적이었습니다.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통제하에 자랐고, 교육열 또한 매우 강하셨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아들놈이 연기를 배우겠다고 하니 순순히 보내주시진 않으셨죠.

그런 반대 속에서 제가 학원을 다니기 위해 3달동안 수백개의 연기학원을 비교 분석한 자료를 아버지께 보여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걸 뭐하러 비교 분석까지 하냐? 싶으시겠지만, 연기학원은 대체로 비싼 편이거든요.
대형 연기학원 같은 경우에는 고3 기준으로 80~120만원 정도였습니다.

제가 3달동안 알아본 결과 저는 15만원에 연기학원을 등록하게 되었죠.
물론 질적으로 양적으로 120만원짜리 학원보다 수준이 낮은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얘기가 그새를 못참고 새어나갔는데, 다시.

연기학원을 처음 들어간 저는 무작정 연기를 배울 줄 알았는데
가장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던가요,
<발음> <발성> <호흡>에 대한 훈련방법을 알려주고 제가 처음 대사를 받게 된 것은 학원을 다니고 3달 뒤였습니다. 충격.

돌이켜보면, 연기를 아예 처음 배우는 학생에게는 대사를 던져주는것보다 가장 기초를 가르쳐주는것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 중, <발성>은 내성적인 제게 너무나도 힘든 훈련이었습니다.
[소리친다]라는 것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화를 내지 못하는 제게 화내는 행동을 시켰을 때에 정말 부끄러워 죽고 싶었습니다 크크

당시 선생님은 그런 저를 보고, 감정은 행동을 통해 표출될 수 있다고 하셨고
소품으로 사용하는 등받이 나무의자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면서 소리를 질러보라고 하셨죠.

처음에는 나무의자를 살살 집어 던지며 '야...!' 라고 했다가
다시, 다시, 다시 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무 의자를 부술 생각으로 집어 던지며 '야!!' 라고 하였을 때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더군요. 흔히 말하는 카타르시스가 표출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반복훈련을 통해 '시옷'발음이 되지 않던 저는 발음도 교정하고,
화 한번 내보지 못한 제가 소리치며 미쳐 날뛰고,
항상 긴장하며 살아서 흉식호흡에 너무 익숙했던 것이 복식호흡을 통해 1분 넘게 쉬지 않고 말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3. 무형의 어떤것과 싸우다

고등학교때에 그렇게 연기를 배우며 삶의 질이 달라짐을 체감하였지만,
연기과 대학 입시에는 매번 실패했었습니다. 총 3년이라는 시간을 입시에 쏟아부었지만 쉽지 않더군요.
그리고 나서 스스로 대본을 쓰고, 무대를 대관하고, 배우를 캐스팅하여 창작극을 올렸으나 그것마저도 망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매번 실패하고, 오디션도 떨어지고, 무대도 망하다보니 어느 순간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연기관련 분야가 아니여도 아무것도 도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또 떨어질텐데..' 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휘어잡고 있어서
아무런 도전을 하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 버린 것입니다.

연기를 접기로 마음먹었었습니다.
그리고 3달정도를 아무도 만나지 못했었죠.
왜냐하면 창작극을 만들 당시에 너무나도 주변에 무조건 성공할거라고 포부를 갖고 자랑을 했었기 때문에
처참한 실패에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죠.

정신 차려보니 나이가 20대 중반을 더 넘어갔습니다.
지금까지 학창시절과 20대를 갈아 넣어서 배운것은 연기밖에 없었죠.

사실 연기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에, 굉장히 후련하면서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짧은 방황을 한 뒤, 아버지가 기술을 배워보라 권유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러 전문대학에 진학하고, 연기 외에 다른 학문을 공부해보니 연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문득 자기 전에, 내가 학교 수업을 듣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10년간 배운 연기를 한 번 쭉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은 글로 표현하는 것이구요.

저는 아직까지도 연기와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아마 끝까지 가면 제가 이길 것 같습니다.

4. 인생의 변화

글을 쭉 쓰다보니, 연기를 배우면서 부정적인 것을 많이 얻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연기를 같이 배운 제 친구들 중, 얼굴이 반반하거나 예쁘다는 소릴 들은 친구들 중 대다수는
연기 훈련을 할 생각보다 본인 외모 가꾸어서 SNS에 사진 몇 장 올리는 게 하루 일과의 끝인 듯 싶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반복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어 보면 텅 비어있다는 느낌을 딱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또는 그녀)들은 자칭 <배우>이기 때문에,
10만큼 갖고 있어도 <배우>프리미엄이 붙어서 100으로 인정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남들이 멋있어 해주고 이뻐 해줘서 어깨뽕이 잔뜩 차올라서 뽕맛에 취해 산다 이말입니다.

참고로 저 또한 그랬었기 때문에 정말 그런 사람이 많다고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기를 통해 얻은 위와 같은 부정적 영향이 1이라고 하면, 긍정적 영향은 100 그 이상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깨달음' 입니다.

연기를 배우다 보면, 희곡이나 시나리오 속 허구의 인물을 연기해야하기 때문에
'그 인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상상으로 목표 설정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수 년간 반복하다보니, 그 질문이 제 스스로에게도 먹힙니다.
소크라테스가 자문자답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다 하였던가요, 저도 [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다보니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목표가 무엇이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되더군요.

물론 인생이란것이 그렇게 순순히 되진 않지만, 그 방향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제게는 큰 '깨달음'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제가 아무리 넘어져도 등대처럼 빛을 비춰주며 방향을 짚어주는 이정표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5. 이야기를 마치며

사실 글을 처음 쓸 때에는 어떠한 연기적 이론,
예를 들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메소드이론이 어쩌구 저쩌구..
연기 방법 중 낯설게 하기라는 방법은 어쩌구 저쩌구.. 를 적어보았었으나

너무 노잼이 될 것 같아 좀 더 편하게,
연기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한 사람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생기실 수 있으니
그러한 방향으로 적었습니다.

적다 보니 '굳이 연기를 안 배우더라도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은 으쯜끈데?' 라는 반문을 스스로 던져보았으나
개개인의 인생의 목표는 다 다르고, 그 가치 또한 본인이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 또한 다 다르리라 감히 생각됩니다.

그냥.. 이십 대 중후반의 혈기왕성한 청년의 잠들기 전 일기장 정도로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좀 더 멋있는 사람, 멋있는 배우가 되어서 피지알 회원분들께 자랑하고 싶습니다 크크크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5-26 21:03)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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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슨벵거날
20/06/10 03:33
수정 아이콘
언젠간 다시 영화처럼 연기의 길로 가시길 기원하면서 몇가지 질문좀 드려도 될까요?

같은 배우라도 왜! 도대체!
드라마 연기와 영화 연기가 다른가요? 전 드라마식?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못 보겠습니다. 근데 영화는 괜찮거든요...
20/06/10 08:41
수정 아이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계실겁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영화나 연극은 관객들이 그 작품을 관람하러 극장에 가고, 드라마는 편하게 TV앞에 앉아 관람을 합니다.
그래서 영화나 연극은 개연성을 위해서 지루한 부분을 관객들이 참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조금 재미없다 싶으면 바로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끄면 됩니다.

이 두 차이점이 그 퀄리티의 차이를 크게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화는 수 개월~ 수 년에 걸쳐서 한 시간~ 두 시간되는 영상을 만드는데 비해 드라마는 한 회를 찍는데 몇 일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죠.

만약 드라마 연기를 영화 연기와 비슷한 퀄리티로 만들기 위해선 그에 버금가는 시간 투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인물을 제대로 연기 못한 배우 잘못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인물을 디테일하게 만들지 못한 작가 잘못이겠죠 크크
사술생
20/06/10 16:48
수정 아이콘
명문이군요 크크 글 잘 읽고갑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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