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10/23 11:50:48
Name 언뜻 유재석
Subject [잡담]철수와 영희의 커뮤니케이션...

이곳은 쌀쌀한 날씨에 운동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진 아파트옆 공원.

철수와 영희가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서 만든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등받이도 없군요.

한 부부가 수은등같은 흰 불빛에 의지해 배드민턴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철수와 영희가 하는 이야기가 들릴 거리는 아닙니다.


철수는 오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왔습니다.

『영희야, 나는 너를 좋아해. 나랑 사귀어 주겠니』 라는 마음을 오늘 만큼은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철수는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전화로 말할까 했지만 주변 친구들이 그건 아니라고 적극 말렸습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고백할때랑 이별할때는 얼굴보고 말해" 라구요.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거 같아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혼자 집에서 연습해보는데 준비할게 너무 많았습니다.



일단 제일 중요한 언어선택부터 고민이 산더미입니다. 그냥 유치하게 할까, 아님 느끼하게? 아 어떡해야하지.

천신만고 끝에 대사를 정하고 나서 거울앞에서 말하려다 보니 목소리부터 또 성가신게 한두개가 아닙니다.

목소리가 너무 높아선 안되겠고, 적절히 쉽표도 써가며 이해할 시간도 줘야했고, 얼굴보고 이야기 하는것이니 표정도 신경써야 합니다.

대충 결정을 하고 나니 이젠 또 시덥잖은 걱정들을 합니다. '둘이 옆으로 나란히 앉을텐데 손은 어디에 두지?' ...

"정말 별게 다 걱정이군요"  가지런히 내 무릎에 올려 놓을까, 아님 터프하게 어깨를 끌어 안을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느정도 완성된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허나 철수 본인은 빈틈없다고 생각했던 시나리오가 막상 당일이

되니 추가할거 투성이였습니다. '옷은 뭐 입지?', '머리는? 그냥 모자쓸까?' 등등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대충 마무리 지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철수는 여기에 앉아있습니다.



영희도 어느정도 짐작은 했습니다. 녀석이 오늘 고백하려고 하는 것을요. 녀석이 집에서 가까운 놀이터 말고 굳이 여기를 오자고 한

이유는 뭐 대충 예상가능한 일이니까요.







드디어...철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연습한대로 완벽했습니다.

『영희야, 나는 너를 좋아해. 나랑 사귀어 주겠니』라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머리로 단어를 신중히 골랐고 입으로 그 말을 전했습니다.

적막한 공원에서 철수의 말은 영희에게 전해졌습니다. 철수는 억양으로, 쉼표로, 표정으로, 그리고 어색하게 있는 손으로, 신경써서

골라입은 옷으로, 단정히 빗기만한 머리로 그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이다 라는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희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 철수의 마음에서 생겨나온 말이 자신의 마음까지 전해지기까지 약간 시간을 주었습니다.

다른건 모르겠지만 안경이 삐뚤어진것도 모르고 웃고있는 모습이나 자기 엉덩이 밑에 넣은 손, 그리고 평소엔 입지도 않는 하늘색 셔츠를

입고나온걸 보며 모르긴 몰라도 엄청긴장했겠거니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이 상황을 수없이 머리에 그리고 연습했을 철수가 생각이나

저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대화란 이런게 아닐까요. 내 마음이 거짓없이, 오해(-_-)없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게 하고 전달받는것.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때 입으로 내뱉어지는 말 뿐만 아니라 표정, 어투, 손동작 같은것도 같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말 뿐만 아니라 표정, 어투, 손동작등도 다 같이 한장면에서 받아드릴려고 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으니까요.


마음에서 나오는 형상화되지 않은 어떤것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려면 이 정도도 부족 할 수  있겠군요.







요즘은 말이 마음은 커녕 머리보다도 더 빠르게 손에서 나옵니다. 손가락이 쉴새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새겨진 활자를 눈으로 보고

본인이 확인한다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모니터를 보고있자니 상대방의 표정이나 손동작을 볼 수도 없습니다. 글자만 보이지요.

헌데 그 글자는 마음에서 나온게 아닙니다. 머리에서 나온것도 아니지요. 그냥 먼저 움직인 손가락이 쳐 내려간것 뿐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쁩니다. 표정도 볼 수 없고 말하는 억양과 어투를 들을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합니다. 상대는 어차피

내 표정과 내 마음을 알리가 없으니까요. 한껏 기분나쁘게 합니다. 어차피 볼일도 없는 사람인데요 뭐.









영희는 엉덩이 밑에 깔려있던 철수의 손을 꺼내 잡습니다. 그리곤 철수의 왼쪽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댑니다.

배드민턴을 계속 치시는 노부부를 보며 말합니다.









『그래, 그러자』 라구요.




쌀쌀한 가을입니다.~_~
* 퍼플레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10-25 02:43)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11-03 14:53)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09/10/23 11:56
수정 아이콘
갑자기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요?
박중훈이 최진실 보고 할 말 있다고 만나자고 했는데, 최진실은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실상 박중훈 입에서 나온 말은 '결혼하자'였죠.^^;;;

학교 다닐 때 선배가 여자친구랑 전화로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선배야 농담한 건데 여자친구는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거지요.
저희야 선배 표정도 보이고, 평소 말투도 알고 있으니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받아들이기는 그렇지 않았나 보더라고요.
왜 대화할 때 표정과 어투, 몸짓이 중요한지 그때 알았다고나 할까요?

근데요, 말씀대로 한껏 기분 나쁘게 하고 싶다가도(뭐 때로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글을 남기는 사람도 나라는 사람이니까 되도록이면 진심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달덩이
09/10/23 12:03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 버튼 누르고 갑니다..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네요 :)
제3의타이밍
09/10/23 12:0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철수는 성공했군요
09/10/23 12:05
수정 아이콘
뵨사마는 키스 + 따귀 + 키스 콤보로 태희여신하고 사귀던데...뵨사마 정도되면 말은 필요 없는것인가봐요.(본문주제와는 별 관계가 없군요)
제르맹
09/10/23 12:21
수정 아이콘
모든 글이 읽는 당사자의 환경이나 기분에 따라 달라진 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정말 가고싶은 기업의 면접을 며칠 앞두고 있는 저는
언뜻 유재석님께서 글쓰신 것처럼
'대화란 이런게 아닐까요. 내 마음이 거짓없이, 오해(-_-)없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게 하고 전달받는것.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때 입으로 내뱉어지는 말 뿐만 아니라 표정, 어투, 손동작 같은것도 같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으니까요.'
이 문구가 가슴에 와 닫네요.

심하게 긴장하는 편이지만, 면접에서 제 마음의 이야기가 거짓없이, 꾸밈없이 면접관님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초록추억
09/10/23 12:23
수정 아이콘
담담하고 담백하게 쓰시는데 맛깔스럽습니다
글쓴이의 평소 섬세함이 느껴지는군요^^
Who am I?
09/10/23 12:25
수정 아이콘
....훗. 하지만 사람만나는건 귀찮아요. 벌렁-

그저 공포영화나 주구장창 틀어놓고, 웹서핑이나 하면서 몸에 안좋은것만 잔뜩 섭취하고 싶을뿐입니다.<-이런 상태.


...생긴사람의 이야기따위!
09/10/23 12:25
수정 아이콘
참 중요한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글이네요~
저절로 추천버튼에 손이..^^;
꾹참고한방
09/10/23 12:25
수정 아이콘
영희씨는 잘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델몬트콜드
09/10/23 12:28
수정 아이콘
생길까요..ㅠ
09/10/23 12:35
수정 아이콘
동감꽝
KIESBEST
09/10/23 12:37
수정 아이콘
동감꽝 (2) & 추천
덧붙여 언뜻 유재석님 잡담글좀 많이 보고싶어요. 글좀 많이많이 써주세요~

아직도 언뜻 유재석님의 12 help yo만 보면 가슴 떨래는 1인...
똘똘이 숨어푸
09/10/23 12:42
수정 아이콘
공감 가는길이네요..
저는 여자친구님이 외국에 계셔서.. 주로 메신저나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해를 주고 받는 경우고 종종 생기더군요..

추천 누르구 갑니당~
09/10/23 13:26
수정 아이콘
언뜻 유재석님의 글은 언제나 삶의 귀감이 됩니다^^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다크씨
09/10/23 13:39
수정 아이콘
철수는 성공했군요 (2)

나도 성공하고싶다...;;

정말 공감가는 글이네요~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BoSs_YiRuMa
09/10/23 13:48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봣습니다. 특히, - 대화란 ~ 뭐. - 까지가 제일 와닿습니다..
요즘에 더더욱 공격적이 된 저에게 필요한 글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와룡선생
09/10/23 13:52
수정 아이콘
아무리 애를 써도 안생겨요..
허클베리핀
09/10/23 14:20
수정 아이콘
아........ 쌀쌀하다. 쌀쌀해. 너무 쌀쌀한 가을입니다.... 여자친구랑 헤어진지 어언 1년이 다되었구나... 어헝헝.
09/10/23 14:48
수정 아이콘
좋은 글에는 추천 쾅!
Lionel Messi
09/10/23 15:1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09/10/23 16:01
수정 아이콘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 이렇게 좋은 글을 혼자서만 봐야하다니..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랑 헤어진지 한달이 다되어 가네요.

근데 왜 자꾸 생각나는지.....어헝헝
BoSs_YiRuMa
09/10/25 15:12
수정 아이콘
에게 입성 축하드립니다.
스터초짜~!
09/10/25 19:33
수정 아이콘
많은걸 느끼는군요.. 잘보고 갑니다..~^
smallsteps
09/10/25 21:52
수정 아이콘
글이 너무 좋아서 블로그로 담아갑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출처는 명시할께요^^;;
09/10/26 21:08
수정 아이콘
거짓과 허세가 널부러져있는 세상이다보니..
요즘 '진정성'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그것.
바로 이 느낌.
09/11/01 14:48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요새들어 많이 생각하던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글로 정리된 걸 보니 좋네요^^
힘내라공무원
11/11/03 15:06
수정 아이콘
철수녀석... ㅠㅠ
Tristana
11/11/03 22:37
수정 아이콘
추게로 왔네요~
닉넴이몇자까지될까궁
11/11/06 23:57
수정 아이콘
드디어 추게로~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536 [잡담]철수와 영희의 커뮤니케이션... [29] 언뜻 유재석13514 09/10/23 13514
535 결혼 후 아기를 가지실 예정이거나 키우고 계신 남자분들에게 드리는 글 [75] 타츠야18779 09/09/29 18779
534 [우주관련] NASA의 아폴로 미션(1호~17호)에 대한 사진과 설명 (스압주의) [49] Arata9028 09/09/28 9028
533 '판도라의 상자'를 연 소프트맥스 [97] The xian24269 09/09/24 24269
532 셔틀리버의 재발견 - 對 시즈모드 탱크 [112] courts18034 09/09/11 18034
531 '거장' 최연성 [39] Judas Pain14324 09/09/02 14324
530 이 사람이 사는 법 [27] happyend8459 09/07/07 8459
529 Just Do It [79] becker21235 09/06/20 21235
528 직접 제작한 프로리그 0809 팀별 순위 변동 [38] Alan_Baxter7426 09/06/12 7426
527 결승전에서 3:2로 진다는 것. [81] DEICIDE21520 09/04/09 21520
526 2009 본격 스덕들을 위한 서사시 - 성실한 왕족, 국본 정명훈 [35] becker15613 09/04/07 15613
525 엄마 전등, 아기 전등 [27] 김연우16410 09/03/06 16410
524 야구 스탯으로 보는 스타 프로게이머들 [74] ClassicMild17632 09/02/25 17632
523 최연성의 끝은 어디인가 [48] becker22883 09/02/17 22883
521 '판'님 스페셜 #1 - 동물의 왕국- [122] Timeless29555 09/01/23 29555
519 서기수. 그의 항해. [44] The Siria8004 08/12/31 8004
518 아버지에 대한 단상 [21] 이동빈5153 08/11/19 5153
517 관대한 세금, 인정넘치던 나라 이야기 [39] happyend7936 08/11/14 7936
516 WCG예찬 [50] 종합백과10123 08/11/09 10123
515 [서양화 읽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39] 불같은 강속구7649 08/11/06 7649
514 마침내 강민이 꿈꾸는 것을 접음으로써. [29] 폭풍검18445 08/09/12 18445
513 왜 부자들을 존경하지 않는가. [35] happyend8226 08/09/12 8226
512 마지막 드리는 말씀 [133] Forgotten_24165 08/09/09 2416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