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6/08/30 13:33:28 |
Name |
그러려니 |
Subject |
어느 부부이야기3 |
"옆구리에 살은 쪄 가지고ㅡ,.ㅡ"
난 그때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정말 기억이 안 난다(...)
단 한마디였다.
그 단 한마디로, 짧지 않은 시간동안의 내 심심찮았던 충고를 귀퉁으로만 흘려 들었던 아내가 묵혀있던 다이어트 비디오를 찾아내 집에서나마 운동하기 시작한게 작년 9월 즈음의 일이다.
수퍼에서 장 보고 나와 멍하니 걸어가다 발목을 삐어 운동을 할 수 없었던, 그에 더해 본격적인 박차를 가하기 전 잠시 또 게으름을 피웠던 지난 겨울을 제외하고, 그렇게 반년을 넘게 피치못할 상황 외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혼자 집에서 씨름을 해대더니, 결국에는 두어달 전 정도부터 운동의 효과가 눈에 띄기 시작하더라.
"오빠(*-_-*), 오빠가 왜, 그렇게 6개월 정도 꾸준히 하면 좋아질거라 그랬지? 생각해 보니까 정말 6개월 정도부터더라?"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연신 종알거리더니 또 다른 얘기를 꺼낸다.
"오빠 기억 나? 언제 술 취해 들어온 날 나랑 말다툼 하고 징징대고 있는 나 보고 오빠가 뭐라 그랬는 줄 알어?"
"뭐-_-"
"옆구리에 살은 쪄 가지고"
"......"
"기억 나?"
"야 임마 취했는데 어떻게 기억하냐. 그땐 임마 내가 취해가지고. ....................."
"내가 그 얘기에 충격 받고 이 악 물었지"
뭐면 어떠랴.
워낙 운동이란 걸 좋아해 땀 흘리며 힘들게 몸 움직이고 난 뒤의 그 말로는 설명못할 쾌감을 아는 나로서는 내 아내 역시 그 쾌감을 느껴내고, 자기 건강 관리하며 몸의 변화를 느끼는 그 기쁨을 꼭 같이 했으면 하고 늘 바랐었다.
더군다나 아내 역시 두 아이 낳고 키우느라 여기 저기 붙은 몸의 군살에 스스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터였다.
둘째 아이가 한참 자라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힘들지 싶다가, 천천히 운동에 대해 운동하는 방법에 대해 이것 저것에 대해 조금씩 얘기해 주고 괜히 맘 상하지 않게 나름대로 격려하기 시작한게 둘째가 4살이 되던 해 부터였다.
그렇게 내딴에는 조심스럽게 잊어먹을만 하면 자각시켜주고 해도 영 기미를 안 보여 저 사람이 정말 어떡할건가 싶었었는데, 술에 취했든 어쨌든, 내가 기억을 하든 안하든, 의도적이었든 어쨌든, 그 한 마디로 그렇게 시작을 했다면 말이다.
"괜찮아. 운동하라고 한게 단순히 살 빼라고 한게 아니란 거 알어. 그리고 그게 미루고 미룬거 시작하게 했으니까. 잘 했어."
눈물이 앞을 가리는도다.
그렇게 반년 넘게 다이어트 비디오 하나를 이렇게 저렇게 변형시키기도 하고 양을 늘리기도 하면서, 처음에는 무식하게(?) 그것에만 신경 쓰더니 이내 음식 양을 조절하고, 섭취하는 음식의 내용에도 신경을 쓰고, 아이 키우면서 열불 난다고 맨날 들이붓던 냉커피도 끊고 지방분해에 좋다는 녹차를 꼬박 꼬박 챙겨 마신다.
"오빠 그리고 있지, 작년까지 휴가 다녀오면 너무 너무 피곤하고 힘들고, 갔다 오면 꼭 몸살 한번씩 그랬잖아. 근데 이번엔 가뿐하더라? 다녀와서도 전혀 피곤한게 없어"
또 한마디를 보탠다.
바로 어제는 큰 아이 유치원 엄마들 모임에 나갔다 온다더니 기분이 썩 괜찮아 보인다.
몇일 전부터 소매없는 옷을 입어도 될까 어떨까 어때 괜찮아 보여 입고 나가도 되겠어 그러기를 반복하더니, 어제 모임에 한번 시도를 하고 결과(?)가 좋았는지 어쨌는지 확실히 다른 날과는 표정이 또 다르게 밝아 보인다.
.
.
.
말이 매일매일이고 말이 반년이지, 그게 따지고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옆에서 같이 운동하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자극 받으며 경쟁하며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경쾌한 음악 알아서 틀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계나 기구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두 아이 유치원 보내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난 뒤 아이들이 돌아오는 시간까지의 그 황금같은 시간동안 집에 들어 앉아 혼자 운동을 시작하고, 혼자 땀 흘려야 하는 것 - 운동 해본 사람은 너무도 잘 알리라. 백가지도 더 댈 수 있는게 바로 '오늘 내가 운동을 못 하는 이유'란 걸. - , 그게 얼마나 지긋지긋한 일인지, 얼마나 끈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한동안은 얼마나 끔찍한지, 그건 정말 아는 사람만이 아는 일이다.
"적어도 더 찌진 않겠지"
그렇게 낙천적인 그 성격대로 조급해 하지 않더니, 매일 빠트리지 않고 운동하는 것이 몸에 배기 시작할 무렵 이런 말을 건낸다.
"오빠. 난 하루 중에, 애들 유치원 데려다 주고 집에 들어와서 운동하고, 샤워하고, 좀 지친 기분으로 소파에 앉아서 잠깐 쉴 때가 젤 행복해."
집에서 하는게 지겨울테니 어느 정도 체력이 만들어지면 헬스클럽에 가라는 얘기에도 다 필요 없다고, 그렇게 내 집에서 그렇게 하고 쉬는게 제일 좋단다.
행복하겠지.
결혼해서 잠시동안은 시부모와 함께 사느라, 괴짜(?) 남편에, 발이 닳도록(?) 드나드는 시누들 상대하느라, 분가해서는 혼자 아이 키워 내느라, 거기다 둘째 아이까지, 하루 한끼 뭘 먹더라도 맘 편하게 혼자 먹어 보는게 당장 소원이라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주변 사람에 치이느라 결혼한 그날로부터 홀로 자유로이 자기만을 위해 아무 것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세상 다른 누구도 아닌 단 한 사람, 가장 소중함에도 짧지 않은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자기만을 위해 움직이고, 땀 흘린 뒤 말끔하게 씻고, '오늘도 해냈다'는 소박한 성취감에 젖은 채로 잠시 한가로이 앉아있는 그 시간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 마중하는 그 시간보다도,
퇴근해 돌아오는 남편을 맞는 그 시간보다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되지도 않는 몸짓으로 춤춰대는 아이들 보며 좋아라 하는 그 시간보다도,
잠들어 있는 아이들 바라보는 그 시간보다도,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그 시간보다도
백배 천배 더 행복하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으랴.
그리고
원래 그렇든 일부러든,
항상 나란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나란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욕심 내고 그 안에서 심심찮게 행복하다 얘기해 주는 이 사람을,
내가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
.
.
"어? 너 인제 복근이?..... 아 아니구나, 그냥 살이구나"
"푸하하하하하학. 아직 복근은 아니지. 그건 얼마나 하면 생길라나?
멀리서 잘못 보고 뱉은 내 한마디에 또 집이 떠나가라 좋다고 웃어댄다.
"내년 여름 휴가 때 둘이 복근 딱 만들어 가자"
일이 피곤하니 어쩌니 나 역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잠시 게을렀던 터라, 오히려 나보다 더 열심인 요즘의 그 사람을 보며 재기를 다지는 한마디에 아내 역시 질세라 응대한다.
"쌍복근 오케바리~"
쌍복근 오케바리.
모든게 오케바리.
당장 오늘 저녁 또 뭣 때문에 피 튀기게 싸울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모든게 오케바리다.
.
.
.
* hom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8-31 15:41)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