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본 적은 있지만 만져본 적 없는 우승컵, 그 우승컵
LA COPA, LA COPA, SE MIRA Y NO SE TOCA
1960년 남미의 클럽간 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 도레스가 출범한 이래로, 언제나 우승은 대서양 연안의 나라들이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독식하면서 태평양연안의 국가들은 우승컵을 만져보질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려 1972년 페루의 수도 리마를 연고로한 우니베르시타리오 데 데포르테스가 결승에 오르면서 드디어 태평양 국가의 클럽에게도 영광이 돌아가나 싶었지만 아르헨티나 클럽 인디펜디엔테에게 우승컵을 결국 내줬다.
그리고 1973년 다시한번 태평양국가의 클럽이 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향해 도전했다. 바로 칠레의 콜로 콜로였다.
1973년 칠레에게 있어서는 두가지 일로 역사적인 해였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코파리베르타 도레스였지만 다른 하나가 더 있었다.칠레의 시인 네루다와 단일화해서 정권을 얻은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인정 할 수 없냐를 두고 온국민이 갈라진 것이다. 이렇게 갈라진 국가는 결국 그해 9월 11일 미군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정권에 의해 무너졌다.
이렇게 완전히 정치적으로 분단된 칠레에서, 콜로-콜로는 이 쪼개된 칠레를 하나로 다시 묶기 위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코파 리베르타 도레스는 1차 조별을 5개조로 치루고, 거기서 각 조의 1위와 전대회 우승팀, 이렇게 6팀을 다시 2개조로 쪼개서 6강을 치루고 2개조에서 1등이 결승을 치루는 방식이었다.
복잡해보이는 방식이지만 조별 과정을 두번 거치고 그 라운드마다 1등을 하면 결승을 간다고 보면 된다.
1차 조별예선을 1등으로 통과한 콜로콜로는 2차조별 라운드에서도 브라질의 포타보구와 파라과이의 세로 포르테뇨를 이기면서 태평양 클럽들의 꿈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도전하게 되었다. 결승의 상대는 전대회에서 그전 태평양클럽 최초 우승을 역시 도전했던 데포르테스를 박살낸 인디펜디엔테였다.
칠레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지만 콜로-콜로의 선전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칠레를 하나로 단결시켰다. 이 결승전의 인기는 어마어마해서 육군마저도 군사 쿠데타 날짜를 미루게 했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역시 칠레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콜로 콜로에게 계속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당시 결승전은 두번의 경기를 치루고 원정 어드벤티지 득점없이 진행되었다. 1차전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구도시인 아벨라네다에서 치뤄졌다. 칠레 전국민이 두근거리며 기다렸던 그날 1차전은 콜로 콜로와 인디펜디엔테, 각각 1:1로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그날 그 경기는 칠레 축구 역사상 가장 최악의 경기로 알려졌다. 칠레 국민들은 아직도 그날의 경기를 ‘아벨라네다의 강탈’로 기억하고 있다.
경기 결과는 콜로 콜로 인경기초 인디펜디엔테의 자책골로 콜로 콜로는 1점 앞서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뒤 인디펜디엔테의 득점이었다. 문전앞 공중볼 경합상황에서 인디펜디엔테의 마리오 멘도자는 헤더를 했고 이게 득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멘도자가 골키퍼를 그냥 손으로 밀어버리면서 득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콜로 콜로의 키퍼였던 아돌포 네프는 그 당시에 대해서 회고하길 “멘도자는 나를 밀어서 넘어뜨렸다. 그는 헤더를 할려고 생각조차 안한 상태였다.”라고 했다.
경기는 1:1로 이어지고 콜로 콜로 선수중 한명은 파울을 범한 상태에서 공을 멈추지 않고 발로 차버렸다는 이유로 다이렉트 퇴장을 당하기 까지했다. 콜로 콜로의 선수들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고 뭔가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2차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어진 2차전에서도 콜로-콜로는 선제골을 넣는데 성공했지만 득점이 오프사이드로 취소되었다. 말도 안되는 오심이었고 경기는 0:0상황에서 끝났다. 당시 규칙에 연장전은 없었기에 최종결정전 경기 하나가 추가되었다. 최종 결정전은 중립국가인 우루과이에서 1주일뒤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원래 결승전에 원정골 어드밴티지가 적용이 안되었지만 최종결정전은 그전 경기득점들의 원정골 어드밴티지를 적용했고 연장전 역시 도입되었다. 확실히 결과를 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오프사이드로 취소된 콜로콜로의 득점장면을 기록한 사진, 명백히 온사이드로 보인다
콜로-콜로는 1:1로 무승부상태였지만 1차전 아르헨티나 원정에서 득점을 했기에 최종결정전을 연장전까지 무승부로 끝난다면 원정골 어드벤티지로 우승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매번 선취골을 넣었던 콜로콜로였지만 이번 최종결정전은 인디펜디엔테의 멘도자가 선취골을 넣었다. 그러나 콜로콜로의 caszely 역시 동점골을 따라 넣었고 스코어는 1:1이 되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콜로 콜로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파라과이 주심이었던 호세 로메이는 콜로 콜로의 레오넬 에레라에게 레드카드를 줬고 콜로 콜로는 한사람이 부족한 상태에서 연장전30분을 버텨야했다. 그러나 끝끝내 이를 버티지 못하고 추가시간 콜로 콜로는 실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칠레의 꿈은 끝났다.
콜로 콜로의 선수 cannely는 자신들이 세번 속았다고 얘기했다. 첫번째는 아르헨티나에서 두번째는 칠레에서 세번째는 우루과이에서 속았다며 말이다. 1973년 코파 리베르타 도레스 이후 칠레에서는 유명한 말이 등장했다.
La Copa, La Copa, se mira y no se toca
우승컵, 우승컵, 우린 본적은 있지만 만져본 적이 없다. 이는 태평양 연안의 클럽들이 2연속 인디펜디엔테에게 깨지면서 나온 말이었다. 대서양 국가의 클럽 우세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인디펜디엔테에게 있어 이번 우승은 대회 통산 4번째 우승이고 이 뒤로도 2년 연속 우승을 더 하면서 코파 리베르타 도레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 되었고 이 4년연속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질 않았다.
'진짜 챔피언 콜로가 패배하다'라고 적혀있는 신문
그렇게 태평양 연안 클럽의 우승이라는 숙원은 1989년이 되어서야 콜롬비아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이 우승하면서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칠레의 우승은 요원해보여서 아르헨티나 국가들은 이 항상 칠레를 비웃었지만 칠레의 드림팀 1991 콜로콜로가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 한을 깨버렸다.
그리고 콜로 콜로는 91년 새로운 말을 다시 만들어냈다.
"la copa se mira y se toca
본 적이 있으며, 드디어 만져본 그 우승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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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랑 축구 유튜브 하나 만들어서 하고 있는데
거기서 쓰기에는 너무 하드한 내용을 칼럼으로 적어봤습니다 즐감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