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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8 01:59
매니악한 영화인데다 스포 까지 있어서 가뜩이나 조회수 올리기 힘드실 텐데 사이에 역대급 포스를 풍기는 글이 있어서 .....
저는 요즘 어려운 영화 잘 안보는 지라 본문에 대해서 할 이야기는 없지만 영화 리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15/03/28 02:04
흐흐 뭐 본문의 내용 자체는 '외관에 낚여서 겁내지 마세요 사실은 엄청 쉽고 통속적이고 소박한 이야기임...그저 작법이 화려하면 그 소박함이 달리 다가오고 위대한 감흥을 줄 뿐.'이라는 이야기기는 합니다. 그래도 감상하기 위한 노력 등의 진입장벽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요.
15/03/28 02:21
그럼 구밀복검님 말씀을 믿고 이 영화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지금 쓰는 제안서만 다 쓰고요..... 그거 다 쓰고 나면 밀린 보고서 좀 쓰고요.... 그거 다음에는.. 아, 아닙니다.
15/03/28 02:36
개인적으로 패왕별희는 참으로 아쉬운 작품입니다. 사멸해 가는 중국 경극이라는 소재가 항우/우희의 운명과 맞물리고, 이것이 중국의 현대사의 질곡과 맞물리며, 등장 인물들의 인생살이가 재차 맞물리고, 여기에 장국영이라는 개인의 인생까지 맞물리죠. 그 겹겹이 쌓인 것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다차원적인 미감을 주고요. 그러나 두지(장국영 분)는 우희답지만 시투(장풍의 분)는 항우답지 못하며, 둘 간의 관계는 그리 애절하지 않고, 두지와 절절한 애증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비중을 좀 더 낮췄어야 할 주샨(궁리 분)죠. 시투가 해야할 언행을 주샨이 대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항우와 우희의 사면초가 상황에서의 패왕별희가 아니라, 평범한 삼각관계의 치정극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극의 연결성과 개연성이 크게 상실되고요. 패왕별희 역시 버드맨과 더불어 인류사 최고의 영화가 될 수 있었다고 보는데,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궁리라는 명망있는 배우에게 전형적인 따까리 롤을 맡기기에는 감독의 권한이 약했던 게 아닌가 싶고요.
15/03/29 19:23
전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소루(장풍의): 극속의 초패왕 마초의 절정. 그러나 생활속에선 더이상 현실적일수없는 소시민. 소시민적 완벽한 사랑을 궁리에게. 국선(궁리): 청루의 간판기생으로 가장 바닥에 처한 인물이지만, 사실 극중에서 끝까지 자존을 지킨 인물이죠. 정첩의와 국선은 어떤 시어머니와 며느리같은 관계이기도 하구요. 마약을 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정첩의을 안아준건 국선이고, 이 장면은 같은 기생으로 정첩의를 버리고 간 생모와 대조되구요. 정첩의: 현실이 극이고 극이 현실인 사람. 미치지않으면 (연기, 그한테는 인생 그자체)가 살수없다는 말대로 우희가 되어버렸죠. 극중의 초패왕에 대한 사랑과 현실속의 단소루에 대한 사랑이 하나로 되였지만, 그한테는 고통스럽게 현실속의 단소루는 초패왕이 아닌 소시민이였고, 국선이 있는이상 단소루를 패왕으로 만들어주고싶어도 만들수가 없는거였죠. 어쩌면 단소루와 같이 있지 못하는것보다 더 고통스러운건, 인생과 연극이 일체로 되여있는 자신을 단소루는 결코 이해를 못한다는 점이였을지도. 원세경: 이 틈을 타고 들어온게 바로 또 한명의 극에 미친 귀족 원세경이죠. 정첩의한테서 되살아난 우희를 보았다고 하였고, 재판장에서도 모든걸 걸고 정첩의를 구해주었구요. 현실의 소시민 단소루와 대조적으로 그야말로 초패왕의 기상을 지닌 인물로, 정첩의의 진정한 이해자이기도 하죠. 어쩌면 그가 정첩의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동성애적 사랑이 아닌 예술혼에 대한 예술혼의 사랑일지도. 초대면에 꿩의 깃털이 들어간 장신구를 선물하면서 이건 산 꿩한테서 뽑아낸거라 이렇게 빛난다고 그러죠. 극치에 달한 예술과 사랑을 추구한다는건 그렇게 아프고 지독한것이다라는 암시죠. 저는 패왕별희가 치정극이라는데에는 절대 동의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이 전쟁과 독재와 문화혁명이라는 파도속에서 어떻게 파멸되는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15/03/30 02:30
남장여자로서 우희로서 외줄타기를 하는 배우, 극에서는 항우이지만 현실에서는 무기력한 배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창녀 등등...그건 모두 설정일 뿐입니다. 서사가 아니죠. 설정이 아무리 화려하고 다채롭더라도 그것이 서사로서 개연성과 의외성을 고루 갖추면서 진행되었을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말이죠. 그리고 이 작품의 약점도 이 설정을 서사를 통해 충실하게 구체화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고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딱 하나만 논해보겠습니다. 패왕별희의 최고의 문제는 공리가 분한 주샨의 비중입니다. 이 영화는 패왕과 우희, 시투와 두지, 중일전쟁기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현대사의 명암, 그 사이에서 사라져가는 경극에 대한 영화죠. 그러면 시투와 두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머지는 곁가지로서 중심 서사의 옆에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면 충분하고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샨의 비중이 너무 커서 주샨이 서사를 잡아먹는 상황이 자주 발생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극 중반부에 시투는 공연 도중 일본군을 폭행하여 구속됩니다. 이때 주샨이 두지에게 시투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두지는 요지부동입니다. 주샨은 두지의 질투심에 가증스러움을 표하면서 딜을 제안하죠. 시투가 풀려나도록 해주면 자신은 둘을 남기고 떠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지는 일본군들에게 웃음을 팔고, 시투는 풀려나죠. 이때 두지와 주샨이 시투를 마중나가며, 이 자리에서 시투는 두지가 절개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침을 뱉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샨은 두지를 안쓰러워하며 침을 닦아주려고 하죠. 이것은 매우 기이합니다. 이전까지 두지와 주샨은 철저하게 연적으로만 그려졌으며, 둘 사이의 공감대는 형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즉, 주샨이 시투에게 버림 받은 두지를 동정할만한 베이스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주샨은 두지를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침을 맞은 두지를 보고 비웃고 지나가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데 말이죠. 게다가 그 이후 시퀀스에서는 갑자기 설명도 없이 장면이 전환되어 주샨과 시투가 결혼을 하게 되고 두지는 실의에 빠져 오 대인과 함께하죠. 두지와 주샨의 딜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냥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죠. 시투와 두지가 사부 앞에 나아가서 매를 맞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는 그저 사부가 매를 때리고 과거지사를 되새기게 하면서 둘의 유대감을 살리면 그만입니다. 그럼으로써 경극이라는 소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 되고요. 그 이상 다른 것을 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저런 것이 무난한 클리셰고 정석이죠. 그런데 그 자리에 갑자기 주샨이 난입해서, 내 남편을 때리기 전에 내 허락을 맞네 마네, 임신을 했네 없네 두 생명을 함께 끊으네 어쩌네 드립을 쳐버리죠. 시투와 두지에게 집중하면서 역사와 세파가 둘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 둘이 이제 어떻게 다시 화합해나갈 것인지, 무너져 가는 중국 경극으로부터 어떤 비애감을 느낄 수 있는지 등등을 관객에게 전달할 자리에서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주샨으로 모아집니다. 국민당 군대가 두지에게 공연 도중 야유를 보내는 장면도 그렇죠. 일단 야유 받고 있는 두지를 주샨이 측은해할만한 이유라도 있는지 의문입니다만, 그건 그렇다 치고...직후에 벌어진 소요 때문에 유산을 주샨은 유산을 하게 되고, 두지는 간첩죄로 체포되죠. 이 상황에서 주샨은 시투에게 '이번에 두지를 구해주고나면 두지와 각자의 길을 걸어가라'라고 종용합니다. 그리하여 시투가 원 대인에게 주샨의 구명을 부탁하기 위해 가는데, 시투가 어버버하고 있을 때에 또 주샨이 난입해서 원 대인의 약점을 거론하며 약속을 받아내죠. 이런 장면도 주샨의 난입 없이 시투가 모든 상황을 처리하도록 그려낼 수 있음에도 굳이 주샨에게 극적 비중을 부여하여 어거지로 주샨이 상황을 하드 캐리하게 만듭니다. 이후 주샨은 감옥에 가서 두지에게는 '너 때문에 상황이 개판 되고 나는 아들까지 잃었다 이 씹쇼키야. 이제 이 건 끝나면 갈 길 가자'고 선언하죠. 하지만 두지는 재판을 망치고, 이때 딥빡친 주샨이 두지에게 침을 뱉습니다.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어이 없는 것은 이후에 마약쟁이가 된 두지를 주샨이 집에 데려와서는 꽤나 적극적으로 보살핀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인지 알 수가 없죠. 그래야만 할 정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오히려 시투는 두지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고요. 이 사이의 러닝타임은 고작 10분이고 주샨과 두지의 앙금은 그대로인지라 관객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컷과 컷 사이,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연결성이 너무 떨어지고 개연성이 상실되어 관객에게 혼란을 가중하는 장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한 이후 시투가 경극단에서 두지를 해고하는 장면에서도, 두지의 신세를 애통하게 여기며 겉옷을 덮어주는 것은 주샨이고요. 여기서 왜 주샨이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두지를 해고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양가감정에 어찌할 줄 모르는 두지가 미안함을 표하기 위해 겉옷을 덮어줌으로써 두지와 시투의 관계를 좀 더 밀도 있게 묘사하고 시투의 캐릭터에 복합성을 부여하는 것이 나을 텐데 말이죠. 이런 식으로 주샨과 두지가 작품 내내 애증어린 관계를 형성하는데, 왜 굳이 그래야하는지 의문이죠. 오히려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은 시투와 두지니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주샨의 행적들의 대부분을 주샨이 아닌 시투가 대신했다고 생각하면 극의 밀도와 집약성과 몰입감은 훨씬 올라가고, 시투와 두지의 관계는 현격하게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저것을 시투의 연적에 불과해야할 주샨이 대신 처리하면서 시투는 쩌리화되고 주샨과 두지의 관계가 오히려 메인처럼 느껴지죠. 그나마 그게 호소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요. 작중 내내 두지는 주샨을 증오합니다. 입체성의 여지가 전혀 없이요. 그러니 주샨도 사실 똑같이 응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주샨 혼자 두지를 잡아먹으려다가도 불쌍해하는 등 일방적으로 속을 끓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리하게 주샨의 비중을 높이다보니, 다른 인물들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인물들의 특성이나 인격 같은 캐릭터는 일관성 있으나, 그에 반하여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어 입체적이기보다는 변덕이 심하고 산만하며 오락가락 한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최대의 피해자가 시투죠. 시투가 할 역할을 주샨이 대부분 가져가다보니 시투의 캐릭터 자체가 평면적이고 별 고민이 없으며 묘사가 미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의 시투의 절규는 조금도 절절하지 않고 그저 악어의 눈물처럼 여겨지죠. 두지하고 제대로 썸씽 가진 것도 없고 두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울긴 뭘 우냐 싶죠. 차라리 저럴 거면 시투가 죽고 두지가 절규하는 것이 훨씬 호소력 있습니다. 평생 사랑했지만 그에게 조금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그가 죽어가는 것을 구경만 할 수밖에 없는 신세..뭐 이런 것도 신파스럽기는 해서 그리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차라리 낫죠. 실제로 첸 카이거 본인이 '궁리라는 명성 있는 배우에게 시시한 역할을 맡길 수가 없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던 것을 보면, 감독 역시도 아쉬움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 비슷한 것이 인터스텔라나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은 것이죠. 앤 헤서웨이라는 인지도 있는 배우에게 일정한 역할은 맡겨야하니 억지로 비중을 부여하는데, 작품과는 그것이 호응하지 못한 극적 완성도를 해치는... 그리하여 감독의 야심은 컸고 그려내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그것이 영화로서 완결성 있게 마무리 되지 못한, 그런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감독판이 있다면 보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제대로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시간 분량 정도는 추가해야한다고 보거든요. 혹은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다든가 할 수도 있을 테고요.
15/03/28 02:29
한때 싸줄러의 으리로 추천!은 아니고
버드맨을 보고 나서 분명 학창시절 들었던 이 영화와 아구가 딱 맞는 노래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하고 생각이 안나던 노래가 있었는데 이거였네요.. 감사합니다.
15/03/28 02:53
제가 피지알 올해의 모든 글을 다 본 건 아닙니다만 제가 올해 읽은 피지알 글 중에선 단연 최고네요. 추천 누르고 도망갑니다.
15/03/28 07:53
스포에 무딘편이라 처음부터 글을 정독 했습니다.
아직 버드맨을 안본터라 더 짜릿하네요. 이어 감사하게되구요. 씨네큐브가서 봐야겠어요. 한번 상영하네요;
15/03/28 17:11
개봉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너무 빨리 내려갔죠. 딱 일주일 끝나니까 우수수 떨어지더라고요. 뭐 예매율이 나빠서 극장들 입장에서도 그리 매력적인 카드는 아니었겠습니다만.
15/03/28 09:15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상, 그리고 그런 세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환상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요.
현실의 상식적인 인과율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다면 우리는 뭐하러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것인지요. 살만 류슈디나 귄터 그라스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소설을 읽는 듯한, 즉 [환상적 요소가 게임의 규칙처럼 주어져 있고 그것이 개연성과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서 현실을 더욱 설득력있게 만드는 것], 제가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제가 피지알에 오는 이유지요. 방송 잘 듣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돌려보기 아까운 글입니다. 무단으로 제 블로그에 담아두고 출처를 링크하겠습니다.
15/03/28 11:09
눈팅족이었던 제가 최근 pgr에 가입하게 된 이유가 가끔 올라오는 양질의 영화글 덕분입니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다른 영화에 대해서도 짧게라도 많이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15/03/28 11:14
안그래도 버드맨 얘기가 너무 안올라와서
비루하지만 리뷰 글을 써볼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안 쓰길 잘했네요. 크크 이런 퀄리티라니!! ㅠㅠ 암튼 저도 제 인생에서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이제 자신있게 버드맨을 꼽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정말 이 영화는 올타임 넘버 원입닌다. 장면 하나하나 모든 요소들이 은유 상징으로 연결되어있고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명료하죠. 버드맨 2번 보고 위플래쉬 보니까 위플래쉬가 너무 허접해보이고 몰입이 안되더군요. 카메라가 휙휙 돌아가는데 정말 어찌나 위화감이 들던지... 한동안 다른 영화를 안 봐야 하나 고민입니다. ㅠㅠ
15/03/28 16:30
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물론 곱씹을 여지가 많기는 한데, 그런 거 무시하더라도 의도가 워낙 노골적이고 명확해서 관객이 노력을 적게 기울이든 많이 기울이든 얻을만큼은 얻어갈 수 있는 영화니까요.
15/03/28 12:03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구밀복검님의 버드맨 리뷰가 드디어... 기다린 보람을 넘어서네요. 잘 읽었어요. 아마 본인께선 '버드맨이라는 소재빨이죠. 좋은 리뷰의 9할은 소재고, 문체니 구성은 남은 1할일텐데, 이 글의 소재는 철저하게 버드맨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주는 만큼 전 받아적기만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실테지만, 그 말이 가당할지언정 이리 받아적기만하는 것도 참 지난하고 어려운 일인걸요.
그리고 이하는... 본 리뷰에 아쉬운 부분이라기보다 딱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다루긴 했지만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말씀하시는 맥락만큼 충분히 엮이진 못할 지점이 있는 거 같아서요. "버드맨 리건의, 아니 배트맨 마이클 키튼의 나체 행진에 경도된 이상, 영화 속의 대중들이 그러하듯 현실의 관객들도 키튼 이외의 다른 요소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번뜩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던 에드워드 노튼은 어디로 갔는가, 나오미 왓츠는 있으나마나한 역할인 것 같은데’와 같은 의문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한참 뒤에 반성적으로 영화를 평가할 때에야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일 뿐, 영화를 보고 있는 도중에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죠."(본문 발췌) 이 부분인데요. 아마 구밀복검님께서는 7, 8을 통해 영화의 외삽된 정보를 알고 있는 우리 관객의 시선이 영화가 조응했는지 이야길 깔아둔 만큼, 바로 연결된 9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감상자의 시선'이 감독의 의도와 안배가 깔린 장치 중 하나라는 걸 자연스럽게 느껴지리라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 자체가 버드맨에서는 좀, 다른 영화에서 보기 드문 방식의 플롯 정당화를 수행하는 고로, 좀 추가적인 설명을 붙여넣어야 그 맥락을 독자들도 제대로 알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구밀복검이 지적하셨듯 영화의 시점을 셋으로 나눈다고 해봅시다. 리건의 시점의 있겠고, 리건 속 버드맨의 시점이 있으며, 리건이 3자를 상정하여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볼만한 3자적/문학에 빗댈시 논평하는 화자적/정신분석의 표현을 빌려온다면, 초자아적인 관객의 시점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이것이 명쾌하게 구획되지 않는 이유로 소재 차원에선 리건이라는 캐릭터 자체의 분열성과 시점 자체의 혼재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형식 차원에선 '원테이크'라는 기법 속에서 모두 뭉뚱그리고 있으니 정당화할 수 있겠죠. 실제로 영화는 중심 인물들이 보이는 특정 양상에 주목하다가도 곧 시선을 돌려 이를 바라보고 있는 3자를 자꾸 비추는데, 주제 차원에선 (본 리뷰에서 지적한 바)백스테이지->무대->객석->리얼 월드와 조응하고, 인물의 차원에서 이건 자신을 비추는 3자적 시선에 대한 리건의 강박을 드러내고, 이러한 맥락에서 형식 차원의 '카메라'란 존재의 정당화 역시 (본 리뷰에서 지적한 바)수행하는 동시에, 관객에겐 직접적으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음, 힌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 영화에서 '카메라'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카메라'를 형식적으로 정당화하는 건 리건이란 캐릭터고, 리건이란 캐릭터 속에서 실제 '카메라'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work를 검열하고 평가하는 시선입니다. 그리고 사실, 자기 자신을 3자로서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에게나 있죠. 다들 그런 경험 있을 겁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뜯어보던 중 갑자기, 거울을 통해 자기 외모를 뜯어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상정해본 적이요(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할 게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3차적인, 아니, 4, 5, 6차적인 자기의식과 의도 파악은 자연스레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이 시선이 늘 따라다닌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니, 생각할 것도 없겠죠. 우리 자신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자신, 거울, 거울을 바라보는 날 바라보는 또다른 나가 바로 리건, 버드맨, 버드맨을 통해 리건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구도에 대응될 겁니다(참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좋은 표현 던져 줬죠. '초자아'. 개념적으로든 표현 자체의 맥락에서건 얼마나 직관적으로 맞물립니까.). 이건 본 리뷰에서도 구밀복검님께서 굉장히 성실하게 짚어주신 부분이고요.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제가 댓글에서 다시 한 번 구차하게 풀어 쓴 이유는, 이러한 정당화가 카메라의 구도만이 아니라 [카메라의 의도]마저도 정당화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카메라의 의도가 뭘까요? 뭐긴요, 카메라가 차별/선별적으로 찍어대는 화면 자체고, 집중하고 눈을 못 떼는 이야기며, 이 장면과 이야기를 잇는 '자의적인' 연결이죠. 다시 '힌트'로 돌아갑시다. 이제 제가 어떤 말씀 드리려는지 다들 아실 겁니다. 영화의 시점이 분명 다층적이지만 그 다층 사이의 위계가 모호하게 한 데 묶여있듯, 이 영화의 플롯 역시 자의적으로 선택되고 배열될 수 있다는 맥락을 꿰어 넣습니다. 왜냐면 리건은 미쳤거든요.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된, 카버의 제사며, 떨어지는 이카로스, 죽어가는 해파리, 처먹는 갈매기 등이 '리건의 영화 시작 전/후의 환상이야'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러한 영화 전/후에 외삽된 흔적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화라고 상정한 플롯 과정 중에서도 같은 식으로 기능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여지를 남기고요. 따라서 본 리뷰에서 지적하는, ‘초반에 번뜩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던 에드워드 노튼은 어디로 갔는가, 나오미 왓츠는 있으나마나한 역할인 것 같은데’와 같은 의문의 경우, 영화를 한 번 (text로)봤을땐 할 수 있을지언정, 두 번, 세 번 (work로서)곱씹어보는 가운데에선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지적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마이크/노튼의 존재감과 레슬리/왓츠의 역할을 티미하게 만든 건 리건의 팬티 바람에 눈을 빼앗긴 카메라이며 - 이 카메라는 우리 감상자 자신이거든요. 마이크가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던 순간을 돌이켜봅시다. 처음 무대에 도착해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즉흥 연기를 보여주면서 [리건을 압도하는] 장면이었죠. 이게 시작입니다. 아직까지 주인공 리건에 대등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이크가 무대 위에서 발기하고, (연극)관객의 시선과 (영화 밖)감상자의 시선 모두 마이크를 향하며, 둘의 관계는 대등을 넘어 역전되죠. 이제 카메라는 마이크를 따라 갑니다.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는 마이크를 비추죠. 리건이 담배 피러 뒷문으로 나가기 전까지요. 이후, 리건은 팬티 바람으로 브로드웨이를 질주하며, 이를 통해 카메라(리건)/감상자의 시선은 다시 리건 자신에게로 쏠립니다. 영화를 볼 당시에야 전체를 조망할 수 없었기에, 이런저런 의문이 있었습니다만, 전체를 한 차례 본 이후 두 번째 영화를 주-욱 돌려보니 제가 가졌던 의문은 그냥 장님 코끼리 만지던 것이었더군요. 아니, 리건이 상정한 시선이 카메라고, 그 카메라는 리건의 의식을 반영하며, 리건은 질투 쩔고 - 비행기 사고 중 다른 놈이 자기가 받아야할 사랑을 가로챌 수 있단 것이나 걱정하는 인간이니까요. 그런 인간이라면 화제성부터 예술성까지 양 극단을 모두 포괄하여 어쨌든 간에 관심을 끌만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메라의 존재가 정당화되거든요. 중간에 리건을 떠나 마이크에게 눈을 뺏기는 것도, 레슬리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양 비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리건 자신이 그려낸 세계가 그 모양인 걸 어쩌겠습니까. .......라는 걸 구밀복검님께서 본 리뷰를 통해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이 9 이전에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만, 이러저러한 맥락들을 독자들에게 주지시켰다고 한들, 쉬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떠올릴만한 건 아니다보니,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보이더라고요. 정말 맥락없는 독자에겐 9가 '위대한 영화긴 한데 약간의 사소한 결핍이 있는 걸 강조하'는 뉘앙스로 읽힐 여지도 있어 보이거든요. 그 결핍이 결핍이 아니란 게 리뷰 속에서 선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 알아먹을 건 정말 영화를 두 번 이상 꼼꼼하게 뜯어본 감상자뿐일 거 같아요. 근데 이 글은 사실 그런 이를 위해 쓴 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도 구밀복검님의 본 리뷰의 경우 work가 아니라 text이니... 여하간 다시 한 번, 잘 읽었다는 말씀 올립니다. 아, 당연히 추천했어요.
15/03/28 17:12
레이디스 맨틀과 라일락에 대한 설명을 약간 추가했습니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누락되었더라고요. 뭐 중요한 것은 아니며 지엽적입니다만.
15/03/29 10:21
찾아보니 레이디스 맨틀은 꽃이 그다지 예쁘지는 않군요. 관엽이나 약효로 더 유명한 허브에 가깝고요.
이파리는 '성모의 망토'로 불리기도 하고 배란에 관여하여 자궁을 튼튼하게 하는 효험을 가지고 있고 임신을 촉진한다고 하네요. 역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리건의 욕망과 연결을 안시킬래야 안시킬수가 없고, 샤이너의 우루보스의 뱀과도 일맥상통하는 이미지이기도 하고요. 더구나 그것을 구할 수가 없어(돈주고는 살 수 없지요!) 다른 꽃을 사온 것도 흥미롭습니다. 위에 적어주신 대로 라일락의 꽃말과도 연관시켜볼 수 밖에 없구요. 그렇게 싫어하는 딸아이에게 특정한 화초의 이름을 지목해서 사오게 한다는 것이 그저 우연한 에피소드였을리도 만무하고요. 샘에게 꽃을 사오게 하는 장면, 꽃병을 깨뜨리는 장면, 프리뷰를 마치고, 또는 첫 공연을 마치고 방안에 가득 찬 꽃 등으로 미루어볼때 [꽃]은 이 영화의 중요한 소품이었음에 틀림없죠. 지엽적인거 아닌 것 같아요.
15/03/30 06:11
그 [다른 꽃]이 장미죠. 샘에게 심부름을 주문할 때에 <장미는 빼고>라는 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리고 그 장미는 리건이 자살 연기를 하기 직전에 그의 감독실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는 전처와 장미들 사이에서 탁상에 눕습니다. 장미는 장례식의 꽃이고...이렇듯 이 영화에서 의미없는 장치와 장면은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15/03/30 09:48
그러네요. 그 대사를 잊고 있었다니...
더구나 샘이 사온 장미는 싱싱해보이지도 않더라구요. 드라이플라워같아 보이고... 장미는 불임(?)이죠. 화려한 꽃이지만 씨로는 번식이 안돼고 꺽꽂이나 포기 나누기로 번식시켜야하는... 정말로 완벽한 하나의 세상입니다. 룰에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네요.
15/03/29 23:39
영화 중요 포인트에서 꽃이 꽤 비중있게 배치되어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세상에 꽃이름에 꽃말까지..... 저는 위대한 예술품이나 고대 문화유산 같은 것들의 숨겨진 의미 같은 것들을 보면서 '꿈보다 해몽인거 아니냐!' 란 주의였는데 이 영화 보는 내내 '이 영화는 진짜구나!' 싶어서 두렵기 까지 할 정도였거든요.. 정말 이 감독 사람 맞나요? ㅠㅠ
15/03/30 06:13
네. 저도 이런저런 전문가들의 갖다붙이기 식 해석 참 싫어하는데, 이 영화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장치들 사이의 일관성이 있어 그러한 해석을 하는 데에 필연성이 부여되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그냥 제끼더라도 영화 감상에 큰 무리가 없기도 하고요. 여러 모로 훌륭한 영화입니다. 껍질을 까든 안 까든 맛있는 과육의 찹잘한 즙을 필요한 만큼 음미할 수 있죠.
15/06/11 21:17
리뷰를 지금 읽었네요. 구밀복검님의 배경지식과 해석이 영화만큼 아름다운 수준입니다. 언젠가는 한국의 굵직한 영화평론가중 한명이 되음직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좋은 글 감사해요.
15/06/15 01:14
리뷰 보려고 영화를 보고 왔네요.
역시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었고, 리뷰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 밖에 생각이 안나네요. 추천이 두번 되지 않는게 아쉽네요. 덕분에 영화의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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