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02/28 19:31:58
Name CoMbI COLa
Subject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가지고
"가난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 중에서 가난만큼은 정말로 숨기기가 쉽지 않다.

아는 형이 한 명 있다. 2008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때 당시 이미 30살이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만학도랑 다르게 나이 많은 신입생이 아니라 그냥 98학번이었는데 개인사정으로 재적처리가 되었다가 재입학을 한 경우다. 어쨌든 학년은 같은 1학년이라 필수교양 과목을 같이 수강했고,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서 팀플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1학년 때 그에 대한 기억은 학교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다는 것과 (심지어 98년도에는 수강신청을 인터넷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써서 했기에 인터넷으로 수강신청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자기 앞에서는 동생들이 밥이나 커피 등을 제 돈 내고 사 먹게 놔두지 않았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집의 가세가 많이 기울어있었다. 다행히 학자금 대출이 있어서 학교를 못 다닐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말 알바만으로는 예전처럼 돈 걱정 없이 놀러다니고 그럴 수는 없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지하철을 타면 기본요금 900원에 추가요금 700원이 찍혔는데 역 2개 전에서 내리면 추가요금이 600원이었기에 그 요금으로 정기권을 끊고 운동삼아 걸어다녔다. 밥은 가능하면 집에서 해결하고 시간표상 어쩔 수 없는 경우는 학식에서 해결했다. 다름 사람들과 어울리면 군것질도 하게되고 학식이 아닌 비싼 밥을 먹게 되니 의도적으로 피했고, 그렇다보니 당연히 내 인간관계는 다 끊어지거나 멀어졌다.

그렇게 1년을 다니고 그 형이 복학했다. 가사휴학과 특별(?) 휴학을 전부 써서 2년 동안 휴학을 했다는데 그 이유가 모아둔 돈이 떨어져서 노가다를 뛰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움에 밥 1~2번 먹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역시나 이래저래 핑계를 대면서 피했다. 물론 이 형은 그 때도 예전처럼 동생에게 밥 값을 내게 하지는 않았고, 나도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얻어먹으면 되는거였다. 그런데 내가 돈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이, 주머니가 비어있으니 심적으로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고 결국은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형은 기어코 나를 찾아냈다. 사실 대학에서 공강시간에 있을만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은 학교 중앙 도서관(자습실) 밖에 없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자습실을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아내고 혼자 밥 먹기 쓸쓸하다, 모르는게 있는데 밥 먹으면서 알려달라 등 등의 이유를 대면서 나에게 점심을 사 먹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뭐하냐? 어디냐? 심심해서 해봤다 그러고, 자기가 가입해 있는 동아리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무너지고 닫히다 못해 자물쇠에 못질까지 되어있던 내 인간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해줬다.

졸업을 하고나서 (지금까지도...ㅠ) 취업을 못 하고 알바로 그냥저냥 살고 있을 때도 이 관계는 지속되었다. 물론 조금 달라진건 있다. 예전처럼 학교를 다니는게 아니라서 알바도 평일에 하고 그러다보니 돈의 여유가 조금 있어서 커피값 정도는 내가 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작년 10월 형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기사 자격증을 준비한다고 했다. 지인으로부터 기사 자격증을 따면 회사에 관리자였나 책임자였나로 뽑아준다는 제안 때문이었다. 그 동안 모아둔 돈이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350만원 정도 있다고 했다. 시험이 3월이니 아끼고 아끼면 반 년 못 버티겠냐고 그랬었다.

그런데 새해가 되자 연락이 뜸해졌다. 1주일에 못 해도 2~3번은 연락하던 사람이 1주일에 1번 연락하기도 힘들어졌다. 어찌어찌 연락이 되면 공부해야 된다는 변명을 하면서 연락도 만나는 것도 회피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그런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 형은 초집중해서 1~2시간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고 먹고 자는 사람인데 공부하느라 바쁘다니... 아니 애초에 공부하느라 바쁜 사람이 왜 배틀넷은 접속중인건데?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몸으로 배운 방법이 하나 있다. 사전에 얘기 없이 무작정 집 근처로 찾아가서 연락을 했다, 받을 때까지. 전화가 되면 지금 근처에 있는데 나와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좀 쉬시라고, 멀리서 왔는데 나오시라고, 지금 영하 10도인데 얼어 죽겠으니 빨리 나오시라고 했다. 그렇게 매주 찾아가서 커피 사고, 밥 사고 심지어 지난 설연휴에도 찾아갔다. 내가 당한(?) 그대로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 말이다.
그렇게 설 연휴까지 찾아오니 형으로서 부담이 되는건지, 동생이 걱정되는건지, 마음은 고맙지만 이제 교통비 낭비하지 말고 그만 찾아오라고 그랬다. 그래서 한 마디 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형한테 배운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요. 저 공부하느라 바쁠 때 맨날 불러내서 밥 먹자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이게 다 형이 뿌린 씨앗인디요?"

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너 이 새X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가지고 말이야, 내가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인거잖아. 너 뒷바라지 하느라. 나처럼 살래?'

"네, 저도 나이 마흔에 공부한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와우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러면 너도 이제 서른이니 졸업 취소하고 학교나 다시 다녀라. 그게 날 따라잡는 첫 걸음이다 이 새X야 크크크'



돌아오는 일요일 3월 5일에 시험이 있다. 붙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글 쓰고 있는 지금도 이 형은 배틀넷 접속 중이다. 심히 걱정된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7-05 16:21)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브랜드
17/02/28 19:35
수정 아이콘
음...이 글을 다 읽고 나니까 와우 하고싶네요. 마침 그 형이랑 저랑 나이도 비슷하고 크크
바스티온
17/02/28 19:50
수정 아이콘
그형이 사실 피지알러였군요..
먼산바라기
17/02/28 19:37
수정 아이콘
음.. 추천 박아놓고 생각하니까 스타하고 싶네요..하
가만히 손을 잡으
17/02/28 19:39
수정 아이콘
밥정이 참 애달은 거라...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네요.
그래도 일단 배틀넷은 끊어야지 않겠습니까?
돌오시
17/02/28 19:41
수정 아이콘
훈훈하고 웃프네요
도들도들
17/02/28 19:42
수정 아이콘
매우 공감되네요..
꼬마산적
17/02/28 19:42
수정 아이콘
배틀넷이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지라........!
마스터충달
17/02/28 19:52
수정 아이콘
정 붙이는 데는 밥이 최곱니다.
이런 지우가 있어서 참 다행이십니다.
영혼의 귀천
17/02/28 19:55
수정 아이콘
읽다가 멈칫... 98학번도 인터넷 수강신청 했는뎁....
비둘기야 먹자
17/02/28 19:59
수정 아이콘
저도 후배한테 일시키고 일찍 퇴근해서 겜 한창인데 두시쯤에 동생 접속했다고 뜨면 숙연해지는...
송하나
17/02/28 20:01
수정 아이콘
훈훈하고 웃프네요.(2)
-안군-
17/02/28 20:21
수정 아이콘
막줄이 핵심이로군요;;
언덕길
17/02/28 20:30
수정 아이콘
저도 3월 5일 기사 시험 준비하다 잠깐 이글을 봤는데 뜨끔..
17/02/28 23:50
수정 아이콘
뜨끔(2)
CoMbI COLa
17/03/01 04:16
수정 아이콘
소음진동기사 라고 합니다.
칸나바롱
17/02/28 20:42
수정 아이콘
저도 20대후반에 대학교 다시 들어갔는데 공감이 많이 되는군요.
Thanatos.OIOF7I
17/02/28 21:47
수정 아이콘
이런 스타일의 덤덤하고 담백한 화법의 글을 너무 좋아라합니다. 괜시리 마음히 짠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쓴분도, 선배님도 행복하셨으면 좋겠네요.
WhenyouRome....
17/02/28 22:33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못된 것만 배우셨네요. 나 잘 되는거만 배우면 나만 중하고 남들은 안중에도 없는데 나 못되는거 배우셔서 다른 사람들 살필 여유도 가지게 됐으니 너무 좋은 걸 배우셨네요. 그 형님도 꼭 기사 자격증 따시길 바라고 글쓴님도 좋은 직장 찾길 바랍니다.
호리 미오나
17/02/28 22:41
수정 아이콘
3월5일 시험이 뭔지 궁금합니다 크크
훈훈하네요.
CoMbI COLa
17/03/01 04:16
수정 아이콘
소음진동기사 입니다. 저도 처음 들어봤네요.
진산월(陳山月)
17/02/28 23:29
수정 아이콘
우정이 별게 아니더군요.

그저 지나가는 듯 사소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
밥이나 한 끼 하자 먼저나가 계산하는 것...
형편에 따라 네가 할 수도 있고, 내가 할 수도 있는...
무심한 듯 실상은 마음 씀씀이가 매우 세심한 것이겠지요.

그런 친구 한 두명이면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따뜻한 글...
17/07/05 21:03
수정 아이콘
다시봐도 훈훈한 좋은 글이군요.

지금쯤 그 형님 시험붙고 취업하셨을지 .. 설마 지금도 베틀넷에 계신다거나 ㅠㅠ
CoMbI COLa
17/07/07 23:0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당시 3월 시험은 당연히(?) 떨어졌고, 지금은 1차 시험 합격 후 2차 시험을 준비중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호드를 위해.............;;
李昇玗
17/08/10 13:55
수정 아이콘
크크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라이펀
17/07/08 03:00
수정 아이콘
부럽습니다 형님과 동생분 둘다 흐흐 새벽에 기분좋게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공정연
17/07/20 13:06
수정 아이콘
저도 저렇게 안풀리는 친구가 있는데 내 친구는 왜 벌써 37살인걸까요...
이제 제발 시험좀 걸리자 제발...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841 아이를 학원에 보낼걸 그랬나하고 고민하다가 안 보냈는데 별문제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아빠가 쓰는 글 [181] Obama25934 17/04/03 25934
2840 한국사 최강의 전투 부대 중 하나, 이성계의 사병 집단 [59] 신불해26113 17/03/30 26113
2839 [의학] 잊혀진 의료기기에 대한 오해 - 소아마비와 철폐(iron lung) [23] 토니토니쵸파13414 17/03/20 13414
2838 최초로 삼국지를 본 서양인들, 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34] 신불해32156 17/03/06 32156
2837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가지고 [26] CoMbI COLa23271 17/02/28 23271
2836 컴알못의 조립컴퓨터 견적 연대기 (3) 그래픽카드 편 [29] 이슬먹고살죠15951 17/02/23 15951
2835 귀함의 무사항해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157] ChrisTheLee38229 17/02/23 38229
2834 날개를 접습니다. [193] 마스터충달26949 17/02/21 26949
2833 미국에서 개발자로 성공하는 방법, 능력을 쌓는 방법 [49] 이기준(연역론)21891 17/02/14 21891
2832 셀프 웨딩 후기입니다. [42] sensorylab26276 17/02/11 26276
2831 의문의 고대 시절 전세계 최강의 패권 국가 [51] 신불해39634 17/02/11 39634
2830 PC방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119] 온리진34459 17/02/10 34459
2829 황제의 아들을 두들겨 패고 벼슬이 높아지다 [27] 신불해24265 17/02/09 24265
2828 한국 사극을 볼때마다 늘 아쉽고 부족하게 느껴지던 부분 [110] 신불해28960 17/02/06 28960
2827 가난이 도대체 뭐길래 [128] 해바라기씨24467 17/02/05 24467
2826 간단한 공부법 소개 - 사고 동선의 최적화 [74] Jace T MndSclptr29404 17/02/01 29404
2825 조명되지 않는 한국사 역사상 역대급 패전, 공험진 - 갈라수 전투 [51] 신불해24624 17/02/01 24624
2824 월드콘의 비밀 [55] 로즈마리24981 17/01/30 24981
2823 할머니의 손 [14] RedSkai12481 17/01/30 12481
2822 "요새 많이 바쁜가봐" [11] 스타슈터19139 17/01/26 19139
2821 명나라 시인 고계, 여섯 살 딸을 가슴 속에 묻고 꽃을 바라보다 [20] 신불해15413 17/01/18 15413
2819 <너의 이름은.> - 심장을 덜컥이게 하는 감성 직격탄 [86] 마스터충달16289 17/01/15 16289
2818 [짤평] 2016년 올해의 영화 [116] 마스터충달20360 16/12/31 2036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