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할머니는 내 취향의 얼굴을 가졌다. 이가 다 빠져 합죽이가 된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은 토끼같이 너무 귀엽다. 할머니 나이는 90이 넘었고 그 자식의 자식도 누군가의 엄마가 될 나이지만, 아프고 힘든 검사를 할 때는 울면서 엄마를 찾는다. 아이고 엄마. 엄마 엄마. 잡고 있던 할머니의 손을 부러 세게 고쳐쥐는 것은 할머니를 격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눈물을 참기 위해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할머니 나이는 90이 넘었고, 근 30년을 같이 산 나의 할머니와 꼭 같다. 이가 다 빠져 합죽이가 된 입을 오물거리는 것도, 흰 피부도, 하얗게 센 머리도 모두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 할머니의 시간은 한 달 전 영원히 멈췄다는 것.
#2.
언젠가 아주 어릴 때, 내 방이 있었지만 그래도 할머니 옆에서 두툼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자는 걸 더 좋아하던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지고 할머니 없는 세상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며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때가 있었다.
3년 전, 할머니가 수술 불가능한 간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한없는 무력감에서 헤어나오기가 참 어려웠다. 이건 내 전공인데, 의학적으로 냉정히 생각해 봐도 결론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것도 같다. 막연하게 상상만 해 왔던 할머니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온 것 같아서, 정말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벨이 울리고 핸드폰 액정에 아빠 이름이 뜨는 것만 봐도 가슴이 철렁하던 때도 있었다.
작년, 우연이라는 이름의 기적으로 할머니가 죽음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 주셨을 때, 나는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끝이 이제 정말 가까워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그 날이 될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고된 하루를 마치고 깨끗히 씻은 뒤 침대에 길게 엎드려 메신저로 친구와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던 그 때. 오후 일곱 시 삼십 분. 아빠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는 순간에도 나는 그게 어떤 소식을 전하는 전화일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반복된 위기는 모든 것을 둔하게 만들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처음엔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지만 시간이 지나 똑같은 위기가 닥쳤을 땐 그게 기적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똑같은 행운을 바란다는데, 나도 그동안 기적을 너무 쉽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너무 울지는 말고, 정리되는 대로 천천히 올라와.
두 번의 기적은 없었다.
할머니는 정말 내 곁을 떠났다.
향년 91세. 사인은 고칼륨혈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3.
부고를 듣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담당병동 교수님들께 전화를 돌려 며칠 병원을 비우게 되었음을 알리고, 의국 비서에게 연락해서 휴가를 내고, 대신 당직을 서고 병동을 봐줄 사람을 구해 환자를 인계했다. 30여분 쯤 정신없이 전화를 하고 나서 더 연락할 곳이 없나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기차 시간이 되어 서둘러 역으로 향했다. 기차에 탑승해서 앉아 있는 순간에도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할머니 방 한 켠에는 15년쯤 전에 찍어 둔 영정사진이 늘 놓여 있었다.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 놓으면 장수한다고, 아파트 노인정에 출장 사진관이 열렸을 때 찍은 사진. 나는 그 사진을 증명사진쯤으로 생각했었던 걸까. 흰 국화에 둘러싸인, 분홍색 한복을 입고 화장을 곱게 한 할머니 얼굴은 너무 젊어서 더더욱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상복을 갈아입은 뒤 익숙한 사진 앞에서 절을 하는데 그제서야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실감이 났다. 정체를 규정하기 어려운 감정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쳐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할머니 그러지 마. 그거 하지 마.
왜 거기서 웃고 있어.
#4.
입관식을 하기 전에, 고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다. 직계가족 중 두명이 필요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과 사촌오빠는 만류했지만, 그때까지 할머니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꼭 내가 가겠다고 우겼다. 염을 하기 전이라서 얼굴을 대부분 가리고 눈과 코 정도만 보여 주는데 익숙한 위치의 점은 내 할머니가 맞았다. 고인이 맞다는 내용의 서명을 하고, 30분쯤 뒤 입관식이 시작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괜찮을 줄 알았지만, 수의를 입히면서 살짝 드러난 가슴의 멍(할머니는 집에서 의식불명인 상태로 발견되어 최초 발견자인 엄마가 bystander CPR을 하셨다)을 보자 바로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살고 있는 나인데, 지금까지 사망선고를 한 사람의 수가 열 손가락을 접어서는 셀 수 없는데. 죽음의 무게가 이렇게 클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울어서 입관 전 할머니에게 마지막 말도 전하지 못했고 자세한 상황도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선명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큰 아들이자 상주인 아빠가 장례식을 마치는 날까지 유일하게 흐느낀 순간이고, 처음으로 아빠의 눈물을 본 순간.
엄마 잘 가셔. 자유롭게 세상 구경 실컷 하시다가, 만 년 뒤에 다시 만나.
#5.
장례식 내내 나는 ‘호상’이라는 소리가 참 듣기 싫었다. 세상에 좋은 죽음이 어디 있어. 90이 넘어서 죽으면 다 호상인가. ‘호상’이라는 단어는 분노유발과 동시에 억지로 막아 놓은 슬픔의 댐 수문을 여는 마법의 단어라서, 조문객이 많은 시간에는 유가족 대기실에 들어가 귀를 막고 울었다.
발인 다음 날, 우리 가족은 모두 모여 할머니 방의 짐을 정리했다. 침대 옆에서는 검은 봉투 은색 봉투에 담겨 꽁꽁 싸매진 약이 한 보따리 나왔다. 종류와 작용기전도 처방받은 날짜도 전부 다르지만 그 중의 절반은 진통제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아팠길래 약을 이렇게 먹어야 했던 거야. 또 한참을 울던 그 때, ‘호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할머니는 적어도 고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을 테니까. 이 많은 약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되니까.
어쩌면 이건 호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6.
할머니의 고향은 복숭아가 많이 열리는 곳이라고 했다.
아직도 생각 나. 대청마루에 엄마랑 나란히 앉아 마당에 주렁주렁 열린 복숭아를 따다 먹던 게.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하신 말씀은 마음에 깊게 새겨져,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나를 80년 전의 어느 여름으로 데려간다. 나는 그 곳에서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한 초가집 마루에 긴 머리를 총총 땋아 내린 열 살 남짓의 어린 여자아이가 머릿수건을 둘러 맨 젊은 여자 옆에 앉아 양 손 가득 복숭아를 쥐고 베어 먹는 모습을 본다.
#7.
할머니는 검사를 마치고 곤히 잠들었다. 어찌나 내 손을 꼭 잡았는지 빼내기가 어렵다. 잠든 얼굴은 평화로워, 꿈 속에서는 내내 찾던 엄마를 만났을까 상상하게 된다. 까칠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생각한다. 나는 이 할머니의 시간을 계속 흐르게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환자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가끔 몰래 눈물을 훔칠지언정 아주 나쁜 것도 아닌 것 같다. 할머니가 키워준 나는 앞으로 더 열심히 살고, 누군가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또 다른 할머니들을 열심히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니까.
나는 나의 할머니를 떠나 보냈지만 매일 수많은 할머니들을 만나고, 생김새도 나이도 다르지만 그 모든 할머니들 속에서 매일 내 할머니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끝까지 전하지 못한 말을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어.
우리 만 년 뒤에 꼭 다시 만나.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1-04 00:1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