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망망대해인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 된 후, 거기에 갇힌 나폴레옹은 체념한듯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계속, 심지어 죽기 반년전까지도 '슬슬 영국의 현재 집권 정부가 바뀌어서 나 좀 여기서 빼주지 않을려나...' 하고 기대했습니다. 물론 유럽 국가들은 나폴레옹을 빼주기는 커녕, 1818년 엑스 라샤펠 회의에서 '나폴레옹의 억류는 계속한다.' 는 재확인만 했습니다만은...
이에 나폴레옹의 가족들, 어머니인 레티치아라던지,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 양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등은 나폴레옹을 되돌아 올 수 있게 하자는 구명운동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굳이 끝장난 나폴레옹을 데려와서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도 없을 뿐더러, 구명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뭔가 영향력이 있을만한 급의 사람들이 있는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끼칠만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쯤이면 되었다. 나폴레옹을 세인트 헬레나에서 데려와서 유럽 땅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해주자.' 고 라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교황인 비오 7세였습니다.
비오 7세와 나폴레옹.
그런데, 정작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있던 시절 이 둘은 '전혀'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정교협약(政敎協約)으로 나폴레옹은 혁명 이후 권위가 다 사라진 프랑스 내에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되살렸지만, 당연하게도 나폴레옹 같은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 새삼 종교적 은혜에 감화되어 "나의 손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프랑스에 되돌리겠다" 뭐 이런식의 마음으로 종교를 프랑스에 되돌렸을 리는 만무했고, 어디까지나 그것이 자신의 프랑스 통치에 도움이 된다 생각했기에 종교를 도구 삼아서 제국에 도입 했던 것 뿐입니다.
나폴레옹 본인의 종교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들고 운명을 주관하는' 신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되 이집트 원정 당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집트 인들에게 "나는 알라의 신자다." 운운 했던 것처럼 내용은 거의 개의치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나폴레옹은 종교의 가치는 (특히 한번 교황청과 완전히 틀어졌던 당대 프랑스 지도층 중에서는 유독) 높이 보면서도, 종교의 '종교 자체의 가치' 부분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민중을 안정시키고 혁명으로 혼란해진 당대의 모랄을 해결하는 '사회를 안정화 시키는 통치수단' 으로서 높이 평가 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 왈,
"내가 어제 산책하다가 교회 종소리를 문득 들었거든. 근데 나 같은 사람도 그 소리를 들으니까 문득 마음 속에 감동이 들더라. 어렸을때 각인된 습관이라는게 이렇게 대단한거야. 그런데 나 같은 사람도 그러는데 소박한 민중들은 어쩌겠어? 느그들 철학자들하고 관념론자들이 백날 떠들어봐야 민중에게는 종교가 필요하거든. 그리고 그 종교는 정부가 장악해야지."
아무튼 이렇게 자기 입으로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는 수준이었으니, 정교협약을 하며 프랑스에 로마 가톨릭 교를 되돌린다, 라고 해도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제시한 조건이라는 것을 대략 보면,
1. 원래 100개가 넘는 프랑스의 교구는 60개로 줄임.
2. 주교의 선임은 나폴레옹이 하고 교황은 그걸 승인만함.
3. 주교가 임명하는 본당의 신부들은 정부의 정책에 반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됨.
4. 주교든 신부든 일단 모두 정부에게 충성 맹세를 함.
5. 아직 압수가 안된 재산이 있다면 돌려주지만, 그 외에 혁명 정부 시절에 압수된 교회 재산은 한푼도 돌려주지 않겠음.
6. 그 외 이런저런 교황이 내리는 칙령들은 프랑스 정부가 인정해야 효력이 생김.
대략 지금 중국에서 가톨릭교 다루는 방식과 비슷해 보이는 수준인데... 아무튼 여기에 본래는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한다' 를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이 조차도 마지막에 협상으로 '프랑스 공화국은 로마 가톨릭교가 대다수 프랑스 시민의 종교임을 인정한다.' 로 바꾸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정교협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빠져나올 구멍을 줄 수 있는 셈이니, 그들의 불만을 잠재워 자기의 통치 안정을 위해서는 당연히 이게 더 좋았음에는 말할것도 없구요.
내용만 보면 거의 일방적으로 교황청이 퍼주는 수준인데, 이러한 조항으로 협약이 체결된 건 나폴레옹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내 말 안들으면 프랑스 전국을 루터 교나 칼뱅 교로 개종시키겠다." 하는 식의 말은 물론이거니와, 협상을 맡긴 외교관 카코를 통해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콘살비 추기경은 얼른 파리로 가서 제일 집정(나폴레옹)을 만나 정교협약을 체결하십시오. 콘살비 추기경이 파리에 가지 않으면 저 역시 협상 결렬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협상 결렬 선언이 되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다음에는 뮈라가 진격해 올 겁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스페인에서 대학살을 펼치기도 한 뮈라
"뮈라가 오면 협상은 당연히 더 어려워질테고.... 일단 그렇게 되면 전 피렌체로 가보겠습니다."
"피렌체는 왜 가는 겁니까?"
"거기서 로마를 정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뮈라를 달래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일집정의 여동생인 뮈라 부인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뮈라 부인은 아주 호기심이 풍부하신 분으로, '로마의 놀라운 풍물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다' 고 항상 뮈라를 부추긴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되풀이 말하건대, 제일 집정과 직접 정교협약을 맺으시지요."
'말 안들으면 쳐들어가서 약탈하겠다' 고 대놓고 운운하는 판이니 당연히 협약은 나폴레옹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물론 교황청 역시 인구 수천만의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으니, 무작정 손해만 본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일을 감수하고도 할만한 일이긴 했습니다.
문제는, 애초에 협약을 맺을때도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 이후에도 파리와 로마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뻔한 일이였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이 교황을 불러 놓고도 교황에게 왕관을 받는것이 아닌, 자기가 직접 쓴 일화는 유명합니다. 물론 이 정도의 절차를 나폴레옹이 현장에서 애드립을 치지는 않았고 미리 협의가 된 부분이었지만, 일설에는 역시 언짢긴 했는지 그 순간 교황인 비오 7세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하여간 이 일은 단순히 나폴레옹의 권위에만 영향이 있는 일이 아니어서 교황의 권위에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고, '일부러 파리까지 갔는데 성별식만 하고 왕관을 수여하지 않는게 말이 되는가' 라고 로마의 추기경들은 교황을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입장이 난처한 교황으로서는 뭐라도 얻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무언가를 해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를테면 로마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해주라던지, 혹은 로마냐 지방을 떼어서 주라던지, 그렇잖으면 현재 프랑스가 민법전으로 허용하고 있는 이혼을 폐지해달라던지 하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죄다 두리뭉술하게 대응했고, 답답해진 교황이 '그러면 일요일을 휴일로 해달라. 그게 가톨릭의 관습이니까.' 라고 제안하자,
"프랑스 사람들은 하도 게으르고 노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걸 만들면 술집이나 환락가만 노날거다." 라는 기묘한 논리로 어물쩡거렸습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런 일이 있으니,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사기 당했다' 고 생각해서 당연히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고, 교황 주변의 추기경을 비롯한 교황청의 여론 자체도 좋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펼쳐지기 직전이 되자, 교황청은 항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로 우리쪽에서 느끼는 것은 오직 불쾌감 뿐입니다. 우리는 폐하가 공정하심으로 호의를 베풀 것으로 예상했지만, 전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폐하가 안코나에서 철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호 관계를 맺기 어렵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자신의 인척인 페슈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에게 있어 나는 카를 대제 같은 사람이다. 상대가 얌전하게 있다면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교황을 로마의 일개 주교로 격하시키고 말겠다. 정말이지 로마 궁정만큼 터무니 없는 헛소리를 하는 데가 없다."
라고 화를 냈습니다. 대놓고 교황을 쫒아내겠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황청에 직접 연락을 보내 "전 이탈리아가 나에게 복종한다. 교황은 로마의 주권자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교황 역시 화가 났는지 "로마에 황제는 없다. 로마의 교황이 로마에서 행사하는 권한이 박탈되지 않는한, 로마에 황제는 존재할 수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나폴레옹과 비오 7세의 대화에 대해 역사학자 펠릭스 마크햄은 "누가 잘못 보면 11세기의 대화인줄 알수도 있을것 같다."는 평을 남겼습니다.
여하간 대립이 격화되자 나폴레옹은 측근인 탈레랑에게 "자꾸 교황이 내 말을 안 듣는다면 나는 교황령의 연안 지방을 모조리 장악해버릴 수도 있다. 그건 일시적인 점령이 될 수도 있고, 최종적인 영유가 될 수도 있다." 고 말했습니다. 즉, 교황청을 그냥 통째로 집어먹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이 무렵 나폴레옹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게 교황인 비오 7세를 노골적으로 비하했는데, 이탈리아 부왕이자 양아들인 외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언젠가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봐서 로마 궁정을 손봐줄 생각이다. 처절하게 후회하게 만들겠지만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다.. 로마에는 편지를 더 안보내기로 했다. 그 '멍청한 영감쟁이' 와는 더 드잡이를 펼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비오 7세를 '멍청한 영감' 이라 부르는 한편,
"내가 볼때, 지금 교황이라는 작자는 세상을 뒤집어엎고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나타난 가짜, 사기꾼 구세주가 분명한 것 같다. 어쨌거나 다행이도 그 작자가 무력하기 짝이 없으니 이것은 신에게 감사를 드릴 일이다. 아무튼 난 그 따위 엉터리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더라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며 교황을 '인간 세상에 고통을 주기 위해 나타난 사기꾼' 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편, 말 뿐만이 아니라 '계속 이 따위로 굴면 로마만 남겨 두고 나머지 교황령 전부를 군사력으로 점거하겠다' 고 직접적인 군사 협박을 감행했고, 이에 놀란 교황청은 로마에 있는 모든 영국인을 추방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여기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 제국의 적, 황제의 적에 대해 항상 제국과 공동 전선을 펼치겠다고 약속' 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렇게까지 하면 교황은 이제 최소한의 명목상의 동맹도 아니고 그저 나폴레옹의 일개 졸개로 떨어지고 맙니다. 비오 7세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고 했고, 그러자 나폴레옹은 진짜로 이탈리아 주둔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려 '로마 진격' 을 감행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교황의 수입 및 재산, 교황이 다스리는 관할 구역 그 모두를 프랑스 제국에 합병하고, 로마는 '자유 도시' 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모든걸 빼앗긴 교황은 퀴리날리스 궁에 스스로 '유폐' 했고 급기야, 나폴레옹을 아예 파문 시켜버렸습니다.
오스트리아와의 결정적인 전투인 '바흐람 전투' 를 눈 앞에 두던 나폴레옹은 파문 소식을 듣자 "완전히 미쳤나 보군. 교황의 추종자를 체포하라." 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즉시 실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의 추종자를 체포하라고 했던 것이, 어찌된 일인지 교황까지 체포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체포되서 끌려가는 교황
아무러한 나폴레옹 이라도 교황을 일개 범죄자처럼 체포 하는 일은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일이었고, 본인 역시 "나는 절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며 여기에 엮였다는 혐의를 전면 부정했습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직접적으로 교황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뮈라 등에게 편지로,
"교황이 자꾸 이딴식으로 나에게 반항한다면 마땅히 체포해야 한다." 하며 마치 교황을 체포해야 한다는 늬앙스로 말을 했기 때문에, 아주 뜻밖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잘못 체포했다면, 놓아주면 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체포한 교황을 풀어주는 순간 교황은 "폭군 나폴레옹이 교황을 체포했다" 고 떠들어 댈텐데, 그 순간 나폴레옹의 대외 이미지는 완전히 엉망이 되는 셈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체포 된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피렌체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 피렌체에 있던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자가 "황제가 말도 안했는데 교황을 여기 머무르게 두는건 꺼림찍하다." 며 거부했기에, 하는 수 없이 교황은 다음에는 그르노블로 질질 끌려갔고, 여기저기 더 헤멘 끝에 최종적으로는 사보나 지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나이가 69세로, 지금 기준으로도 적지는 않은데 당시로서는 아주 고령이어서 이리저리 끌려다닌 끝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고, 마침내 사보나에 도착했을때는 누가보더라도 처량할 정도로 불쌍한 몰골이었다고 합니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감금이었지만, 나폴레옹은 명령을 내려서 "그 늙은이가 절대로 투옥된 것처럼 보이게 하면 안된다. 교황을 감시하는 호위병의 복장을, 마치 교황을 모시는 의장병 같은 차림새로 꾸며라." 라며 지시를 내려서 "이건 교황을 보호하는 거지 감금이 아니다." 며 위장술을 펼쳤고 마침 나폴레옹이 바흐람 전투를 승리로 끝내며 위세가 절정이었던 시기였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따지고 드는 다른 나라는 없었습니다.
여하튼 완전히 포로신세가 되어버린 꼴이었는데도, 비오 7세는 여전히 나폴레옹에게 저항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착각한 것은 비오 7세가 정치에 능한 타입의 성직자라거나, 혹은 겁을 주면 적당히 굴복시킬 수 있는 타입의 성직자라고 생각했던 점이었습니다. 교황 비오 7세는 되려 '순교자' 타입의 인물이었고, 종교적 신념을 지킨다면 죽어도 좋다는 성격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 역시, 자기가 교황을 완전히 잘못 보고 조치를 잘못 취했다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눈이 멀었었지. 교황을 나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었으니. 그가 나에게 저항할때도 난 그게 그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의지가 약하니까 주변 측근들의 사악한 충고에 굴복했다고 말이야."
이제 재산도 영토도 모두 다 잃어버린 교황이 나폴레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동시에 마지막 수단은, 바로 주교 임명권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던것처럼 프랑스에 주교가 임명되려면 나폴레옹이 사람을 고르고, 교황이 형식적으로 이를 승인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811년 '제국 주교회의' 를 소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주교 임명이 6개월 이상 지체되면, 대주교가 그의 대리인으로 주교를 임명할 수 있다' 는 원칙을 동의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비오 7세는 여기에 동의하는걸 거부하고, 여기에 모인 주교들도 "교황이 오지 않으면 이 회의 자체가 무효다" 라고 주장했기에 나폴레옹은 공의회 자체를 해산시키고 몇몇 주교를 체포하는 등 난장판이 펼쳐졌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번에는 교황을 사보나에서 자기가 살고 있던 퐁텐블로로 끌고 왔고, 이쯤에서 정교협약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그렇게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나폴레옹도 결국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며 몰락하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교황과 담판으로 다시 협상을 펼치려 했습니다. 여기저기 손이 아쉬운 상황이니 교황의 지지라도 빌려보려고 한 셈입니다.
교황은 당초에 오랫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지친 탓인지 나폴레옹이 제시하는 조건에 승낙했지만, 다시 되돌아와서 보니 좀 아닌것 같아 기존의 협상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고, 여기에 신경을 쓸 수 있는 형편의 나폴레옹이 아니었기에 결국 어찌어찌 바뀐 조건으로 승낙, 마침내 교황은 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 체포 되어 끌려간지 장장 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나폴레옹은 거의 포기한듯 하면서도 막상 "어쩌면 세인트 헬레나라는 감옥에서 갈 수 있도록 유럽의 조치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럽의 지배자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나폴레옹을 그 살기 안 좋고 망망대해인 세인트 헬레나보다는 유럽으로 데려와서 살게 해야 한다."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관용을 호소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에게 수난이란 수난은 다 당했던 비오 7세였습니다. 비오 7세는 영국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습니다.
"1801년, 그의 경건하고 용기 있었던 행동은 우리를 감동시켰고, 그 후의 여러 잘못을 잊고 용서하게 합니다. 물론, 사보나와 퐁텐블로에서의 일은 판단의 잘못이었고, 또는 과다한 인간 야심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정교협약' 은 치유를 위한 기독교적인 동시에 영웅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폴레옹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우리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누구에게도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디 그로 인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아무래도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그 멀고 살기 힘든 섬에서 쓸쓸하게 마지막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이런 비오 7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한때 나폴레옹이 '멍청한 영감쟁이' '인간 세상에 나타난 추악한 사기꾼' 라고 모욕하던 사람이, 나폴레옹이 가장 외롭고 쓸쓸할때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게 참 기묘한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