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11/06 13:59:38
Name ohfree
Subject 술 한잔.


친가쪽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지껏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대략 십년에 한 번 정도 모이는 것 같다.

장어집을 하는 고모네 놀러가서 샷다 내리고 다른 고모들과 함께 술판을 벌인다.

우리 고모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가게가 떠내려 가려 한다.

각자의 인생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덩달아 술잔도 오르내린다.
큰고모가 맞은편에 앉은 우리 엄마와 짠~ 하려는데 엄마 옆에 앉은 -술잔을 들지 못하고 있는 - 큰고모부의 모습이 여간 처량한게 아니다.


큰고모부는 애처가셨다. 큰고모를 굉장히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몹쓸병이 찾아오면서 점점 기억하는 것들이 사라져갔다. 아내도 자식도…

지금 고모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예전의 그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할머니일 것이다.
고모는 술 때문에 치매가 생긴것이라 생각해서 고모부가 술 마시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고모부의 손이 술잔에 다가갈라 치면 고모가 칼같이 잘라내었다.
사탕 뺏긴 아이처럼 처량한 모습의 고모부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이때 엄마가
‘너무 그러지 말어. 오늘같은 날은 한잔해도 괜찮해’

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술잔을 고모부 입으로 가져간다.


어어. 고모가 말릴틈도 없이 술잔은 넘어가고 엄마가 장어 한쌈을 야무지게 싸서 고모부에게 먹여준다.

술한잔과 부드러운 장어 한쌈에 금새 환한 얼굴을 되찾은 고모부.
고모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울엄마가 먹이니 뭐라 하지는 않으셨다.


고모부 입으로 술이 석잔쯤 들어갔나…
고모부가 고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모도 뭔가 낌새가 이상했던지 고모부를 바라보았다.

고모부 입에서는 또렷하게

‘순이야’

라는 말이 나왔다.


거동도 불편하시고 말씀도 잘 못하시던 고모부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고모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순이는 젋었을적 고모부가 고모를 사랑하였을때 불러주었던 애칭이었다고 한다.



술 석잔에 고모부는 기억의 테잎을 되감아 사랑했던 여자를 떠올려 내었다.
지금 고모부 앞에 앉은 사람은 10분전의 그 무서운 할머니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앉아 있었을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을 해도 그러하다.
이제는 잘해야 일년에 두번을 만나는 친구이기에 별 할말은 없다.
지난 설날에도, 추석에도 그렇고 낼모레 설날에도 그럴 것이다.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뜯어 먹을것이다.
수업시간에 낙서하다가 밀대 부러지도록 맞은기억, 수능 끝나고 술 처음 먹고 하루종일 토했던 기억 등… 뜯어먹을 안주거린 많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과 함께 고등학생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 집에 들어가자고 했을 때 안 들어가면 인사불성이된다.




술한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주는 마법의 약물.






아… 행여 전 여자친구하고 술 한잔 하면 아름다웠던 시절을 같이 회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그러진 말자.

왜?

그냥 하지마. XXXX아.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4-09 15:3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에린의음유시인
18/11/06 14:35
수정 아이콘
고모부님 이야기. 가슴이 먹먹하네요. 두 분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모히
18/11/06 14:40
수정 아이콘
아.. 좋네요
18/11/06 15:11
수정 아이콘
헤어지고 시간이 좀 지나면 전 여자친구랑 술 한잔 해보는 편인데, 저는 좋았어요. 별개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걷자집앞이야
18/11/06 15:49
수정 아이콘
코 끝이 찡해졌어요.
유자농원
18/11/06 16:28
수정 아이콘
말없이 올라가는 추천수
아타락시아1
18/11/06 16:34
수정 아이콘
술에는 정말 묘한 힘이라는게 있을까요?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을 끄집어내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일으켜 세우는 그런 힘 말이에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세상에서 술 먹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만 이런 글을 볼 때 마다 가끔 10년 뒤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프케이
18/11/06 18:00
수정 아이콘
제가 좀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순간 눈물이 났네요.
고분자
18/11/06 19:12
수정 아이콘
건강해치는거긴 한데 가끔 생각날때가 있지요.
글 잘 읽고 갑니다.
로그아웃
18/11/06 19:13
수정 아이콘
순이야 딱 세글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마무리도 완벽 크으
Supervenience
18/11/06 19:35
수정 아이콘
빌드업 클라스가...
나무늘보
18/11/06 19:4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막줄 크크크크크크크크
추천합니다!
주파수
18/11/06 22:36
수정 아이콘
전여자친구랑 다시 만나서 결혼하신건가요? 크크
진산월(陳山月)
18/11/06 22:4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고맙습니다.

하루 하루 술로 연명하고 있는 처지라 더욱 가슴이 쓰리네요.
음냐리
18/11/06 23: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참 좋군요. 근데 저는 뭔가 인생의 허무함 같은걸 느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다 부질없다...자주 만나던 친구와도 점점 보기힘들어지고, 정말로 좋아했던 여자가 변함에 따라 그 감정도 점점 변하고...이걸 정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인생이 고착화되고...그러다 나이 들고 여러 병이 찾아오고...인생 80살 정말로 의미없다는 생각이 느껴지네요. 저도 그 길을 따라 걷겠죠. 그냥...좀 짧더라도 하고 싶은걸 다 하면서 사는 인생이 정말로 좋은거 같아요.
쌍둥이아빠
19/04/11 16:00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이제서야 봤네요.
몇번을 읽어봐도 참 따뜻한 글입니다. 막줄 뺴고요 크크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아내랑 맥주 한잔 해야겠네요^^
19/04/19 07:45
수정 아이콘
에게는 약물을 먹고 보기에 참 좋습니다.
이 글은 약물을 먹고 보기에 더더욱 좋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027 마미손과 회복탄력성 [49] 2224665 18/12/06 24665
3026 교통공학 이야기 - 5. 자율주행에 관한 쓸데없는 잡설들 몇가지 [76] 루트에리노11660 18/12/06 11660
3025 [여행]일본여행 올해 1년 12달간 12번갔던 후기 모아서 올려봅니다(다소 스압) [43] St.Johan13275 18/12/05 13275
3024 목숨 걸고 전쟁하던 옛 시대의 지휘관들 [53] 신불해20762 18/11/28 20762
3023 최초의 여신과 고자 아들이 로마제국에 취직한 이야기 - 키벨레와 아티스 [20] Farce12835 18/11/27 12835
3022 [기타] 원효대사 144Hz 해골물 [94] anddddna30050 18/12/04 30050
3021 [기타] [워3][RTS] '운영'에 대한 고찰 [31] 이치죠 호타루10587 18/12/01 10587
3020 정사 삼국지보다 재미있는 '배송지' 평 [52] 신불해21943 18/11/24 21943
3019 1592년 4월 부산 - 흑의장군 [20] 눈시BB9365 18/11/22 9365
3018 (삼국지) 조위의 인사제도 (2) - 구현령 [21] 글곰10009 18/11/17 10009
3017 조심스럽게....한번 올려보겠습니다 [63] 태양연어23879 18/11/16 23879
3016 고기가 먹고 싶었던 제국 - 아즈텍 [70] Farce27519 18/11/14 27519
3015 The Haruhi Problem - 덕후의 위대함 [31] 플라스틱13904 18/11/08 13904
3014 술 한잔. [16] ohfree10523 18/11/06 10523
3013 진순신, 그리고 <이야기 중국사> [18] 신불해11955 18/11/02 11955
3012 [기타] 진지글)인싸가 게임업계를 망치고 있다! [250] 아이즈원53496 18/11/27 53496
3011 Case Study : 포드 핀토(Ford Pinto)에 관련한 세 가지 입장 [13] Danial9463 18/10/31 9463
3010 이름부터가 북쪽의 땅 - 노르웨이 [36] 이치죠 호타루14107 18/10/27 14107
3009 TMI - Too Much Information 에 관하여 [69] 앚원다이스키13572 18/10/24 13572
3008 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를 근대화 시키다 - "그래서 지금 행복합니까" [37] 신불해14418 18/10/18 14418
3007 고기의 모든 것, 구이학개론 2부 #1 (들어가며 - 구이의 역사) [34] BibGourmand9941 18/10/15 9941
3006 어머니, 저는 당신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93] EPerShare20648 18/10/11 20648
3005 나를 나로 만들어줬던 강점이 나의 한계가 되는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16] Lighthouse13170 18/10/06 1317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