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이 시대로부터 무려 1,800여년 전에 쓰여진 책 입니다. 후한이 멸망하고 난 뒤에 들어선 삼국을 다룬 이야기니 소위 중국 24사(史) 중에서는 후한의 역사를 다룬 범엽의 '후한서' 다음 순서에 놓일 책입니다만, 실제로는 삼국지가 후한서보다 100여년은 앞서서 나왔기 때문에(진수는 다들 알다시피 삼국 시대 이후 서진 사람, 범엽은 서진 이후 동진 이후 유송 시대 사람) 훨씬 더 당대에 가까운 사서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로 오래되었기에 한국이나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서로 인정 받습니다. 삼국사기가 한국의 고대사를 다룬다고 하지만 삼국지에 비하면 무려 800년은 더 뒤에 쓰여진 책이고, 그 삼국사기보다 더 먼저 쓰여졌다는 일본서기도 정사 삼국지보다는 수백년 뒤에 나온 책입니다. 정사 삼국지가 없었으면 중국은 둘째치더라도 한국이나 일본의 고대사는 훨씬 빈약해졌을 겁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역사학적으로 가치가 있는게 정사 삼국지라는 사서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읽는 입장에서는 별로 재미는 없는 편입니다. 물론 사서라는게 재밌으라고 쓰여진 건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야 주관적이지만 그 문제 중에 하나가 기록이 너무 간략하다는 겁니다. 정사 삼국지는 번잡하지 않고 정갈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인물의 대체적인 약력과 아주 대표적인 일화 한두어개 정도 넣고 단출하게 끝나는 식이 대부분 입니다. 좋게 보면 깔끔하지만, 역사를 보는 입장에서는 좀 번잡하더라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기록들이 풍부한 편이 훨씬 좋습니다.
예전 사람들도 정사 삼국지만 읽으면 뭔가 고깃집 가서 고기도 제대로 못 먹고 나온 느낌은 똑같았는지 너무 단촐한 구성에 갑갑함을 느꼈고, 결국 당대 자료인데 진수가 어떤건 신빙성이 떨어져서, 어떤것은 정치적 이유로 어른의 사정이 걸려서 제껴놓았거나 하는 사료들, 혹은 당대는 아니더라도 좀 더 뒤에 나온 여러 사료를 종합해서 주석을 달았고, 그것이 바로 배송지(裴松之) 주 입니다.
주석이라고 해도, 무려 150여권이나 되는 책에서 기록을 따와 주석을 달았기 때문에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합니다. 무엇보다 정사 삼국지가 무슨 '두산백과' 같은 느낌으로 대체적인 큰 행적을 언급하는데 중점을 둔다면, 여기저기 사서에서 자료를 가져온 주석에서는 '일화' 가 나오기 때문에, 큰 행적 사이에 있는 인물들의 여러 일화를 보면서 1,800여년 전인 삼국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배송지가 주를 달지 않았다면, 삼국지연의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배 주(註)로 인해 정사 삼국지는 좀 더 기록이 풍부해졌지만....이건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한데 그래도 정사 삼국지는 그다지 재미는 없습니다. 물론 사서라는게 소설 같은 느낌으로 보면 다 재미없게 느껴지긴 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좀 재미없게 느껴지는건 주석을 다니까 반대로 '번잡' 하게 느껴지는 점인데, 이를테면 사마천의 사기 같은 경우엔 사마천이 여러가지 자료를 살펴본 뒤 본인이 그걸 하나의 글로 엮어서 '정리' 를 하면서 완전히 하나의 내러티브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정리되고 체계가 갖추어진 하나의 연대기를 읽는 느낌이 있습니다.
반대로 배송지 주 같은 경우에는 온갖 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주석으로 이어붙였기 떄문에 좀 번잡하게 느껴져서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는다고 하면 좀 잘 안 읽혀지는 느낌이 있더군요. 그런데 사실 이 점은 역사학적인 면으로 보면 배송지가 굉장히 잘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보는 중국 25사니, 자치통감이니 하는 기록들은 결국 원래 자료가 된 1차 사서를 바탕으로 역사가가 일종의 주관-그게 완전히 정치적인 목적이든, 혹은 본인의 학술적인 판단에서 상충되는 기록 중 하나를 골라잡든-를 섞어서 만들어진 '2차 자료' 인데, 이 경우는 아주 심도깊은 분석을 한다고 해도 어디까지가 주관이고, 이 단락은 어느 1차 자료를 바탕으로 했고 하는 부분을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배송지는 수많은 주석을 붙이면서도 그 주석의 출처를 명확하게 기재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합니다.
이건 이 사료에서 나온 부분인데 이 사료의 성격을 고려하면 신빙성을 이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사료와 이 사료에서 나오는 내용이 상충 되는데 이 사료를 쓴 저자의 이런 부분을 고려하면 이쪽이 더 신빙싱이 있겠다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려 1,800여년 전일이니 어쨌든 기록 한 줄이 우리에겐 아쉬운 일인데, 정사와 야사를 비롯하여 온갖 자료를 남겨준 것만으로도 후대 역사학자들에겐 큰 은혜를 베푼 셈입니다. 배송지가 인용한 여러 사서가 현재로선 실전된게 아주 많으니까요.
배송지 본인도 주관이 있다보니, 이런저런 자료를 수집하면서 본인의 생각과 맞지 않거나, 터무니 없다고 여기거나 하는 기록도 많았을 겁니다. 요즘에도 있는 일이지만 자기 입맛에 맞는 기록만 취사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송지는 설사 자기 생각과 들어맞지 않다고 여기는 기록도 죄다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는 이런저런한 점 떄문에 이 기록을 신뢰하진 않는다." 고 평을 했구요. 배송지로서는 자신의 의견을 남긴 것인데, 배송지의 의견이라고 꼭 모두 맞으라는 법은 없으니 배송지가 신뢰를 보이지 않는 기록에서도 취할 것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 덕택을 볼 수 있습니다.
배송지
하여간 그렇게 앞 시대의 걸출한 인물들을 다룬 배송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기실 이 배송지라는 사람 본인도 자기가 기록을 남긴 어지간한 사람들 못지 않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논어' '시경' 정도는 나이 8살 때 이미 통달하고, 동진 말엽 남조의 호걸 유유가 북벌하여 낙양을 수복할때도 종군하여 유유로부터 "나라의 큰 일을 맡을만한 국사(國士)의 인물." "변경에서 썩혀두고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평을 받아 추천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중에 실패하고, 이후 유유의 손에서 탄생한 유송이라는 국가가 워낙에 악명을 떨쳐서 그렇지, 이때의 북벌은 남조 국가로서 낙양과 장안을 수복하고 산동을 모조리 회복하는 유례없는 수준의 북벌이었기에 이때의 동진은(황실이 넘어가게 생겨서 그렇지)국가의 위세는 결코 위, 촉, 오 보다 떨어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그 정도 규모의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에게도 인정받을 사람이었으니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여하간에 그렇게 학식이 있던 배송지가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주를 달아 배송지주라는 역작을 탄생했는데.... 개인적인 의견으로 '그렇게 재미는 없다.' 고 생각하는 정사 삼국지에서 유독 눈에 확 가게 '재밌다' 고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그 배송지 본인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즉 여러가지 기록에 대한 배송지의 평들 말입니다.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한 직후 마초가 매양 유비를 부를때 "현덕" 하면서 자를 함부로 부르자 관우와 장비가 매우 언짢게 생각했고, 그를 죽이려고도 마음 먹었지만 유비가 반대하여 유비 곁에서 위세를 보이며 마초를 위압하자 겁에 질린 마초가 "아, 내가 자를 함부로 불러서 관우와 장비를 화나게 했구나. 내가 유비 아랫사람이니 알아서 숙여야겠다." 고 생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
여기에 대한 배송지의 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또한 이치로 볼 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일 것을 청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이에 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단지 두 사람이 곧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으로 이내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임을 알아채고는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겠는가?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음이 너무 심해 가히 분질(忿疾-분노하고 미워함)에 이르는구나. 원위(袁暐-헌제춘추의 지은이), 악자(樂資-산양공재기의 지은이) 등이 기재한 여러 대목은 추잡하고 헛되고 그릇되니(穢雜虛謬) 이와 같은 부류가 거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다."
배송지는 해당 일화가 어째서 말이 되지 않는가 하고 조목조목 비판하더니, 갑자기
"이딴 소리들은 진짜 말이 말 같지도 않아서 내가 막 분노와 증오심까지 일어나는구나. 이런 인간들이 쓴 대목들은 하나같이 추잡하고 헛소리고 말도 안되는 수작들 뿐이니 진짜 말을 다 할 수 없다."
하면서 분기탱천, 1,000년도 훨씬 이전의 사람이 쓴 글인데도 불구하고 감정이 워낙에 절절하게 느껴지다보니, 무슨 인터넷 블로그에서 본 감상글 같은 친숙함이 느껴집니다.
다음은 관우가 형주에서 패배하고 오나라에 포로로 잡혔을때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손권이 관우를 항복시키고 싶어서 권유했지만 관우가 듣지 않아서 결국 처형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상 손권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집니다. 해당 부분에 대한 배송지의 평은,
신 송지가 오서(吳書)를 살펴보건대,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도주로를 끊고 관우가 당도하자 이내 참수했다. 게다가 임저에서 강릉까지 2-3백리 거리인데 어찌 관우를 때에 맞춰 관우를 죽이지 않고 바야흐로 그 생사를 의논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또 이르기를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했다’고 하니 이런 터무니없는 말은 가히 지자(智者)의 말문을 막히게 할 만하다.
배송지는 손권이 텔레포트라도 쓰지 않는 이상 어찌 관우를 보려고 수백리를 달려 생사를 의논할 수 있겠느냐며, '손권이 관우를 살려서 유비와 조조를 맞상대하려고 했다' 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런 견소리는 머리가 있는 사람들의 말문을 턱 막히게 한다." 고 아주 절절하게 감정을 표시합니다. 말문을 막히게 한다는 표현이 왜 이리 웃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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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관중을 진수할 때, 사마 고평(高平)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금성(金城)사람 곽충(郭沖)은 ‘제갈량의 권지(權智-임기응변과 지혜), 영략(英略-뛰어난 지략)이 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해당 내용은 제갈량에 관한 기록 중 소위 '곽충 5사' 라고 불리는 내용인데, 삼국이 통일된 서진 시기 사마의의 아들인 부평왕 사마준이 관중 지역에 오게 되고 자연히 몇십년전 관중에서 항쟁했떤 제갈량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관중 사대부들이 "제갈량은 재주도 없으면서 계획만 거창하게 세워 백성만 수고롭게 했다." 고 비웃었고,
이에 곽충이라는 사람이 "잠깐! 제갈량의 재주는 그 옛날 관중이나 안영보다도 뛰어났다. 그 증거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섯 가지 일이 있는데, 내가 지금 예시를 들어주마." 라고 말하면서 그 사례를 언급하자 다른 사대부들이 감히 반박을 못하였고 사마준은 "곽충의 말이 옳은것 같다." 고 했다는 내용 입니다.
이 곽충 5사 중에 제일 유명한 내용인 '제갈량이 성 위에서 금을 타서 사마의를 겁에 질려 달아나게 했다.' 는 내용 입니다. 다만 해당 전쟁 당시 사마의는 멀리 완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중론 입니다. 떄문에 곽충 5사의 다른 기록들도 신빙성을 의심 받습니다.
여기에 대한 배송지의 평.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의 남다른 훌륭함이라면 실로 듣고 싶은 바이나, 곽충의 말은 모두 의심스러우니 삼가 각 일화의 뒤에서 비판하려 한다.
배송지는 "아니, 제갈량의 훌륭한 일화가 달리 더 전해져 내려오는 게 있다면 나도 한번 진짜 듣고 싶다." 면서, "다만 곽충의 말은 잘 생각해보면 헛소리 같은데 일단 소개 하고 나중에 비평 하겠음." 이라고 선언합니다.
여담으로 배송지의 평론을 보다보면, 배송지가 제갈량을 대단히 흠모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위서의 기록 중에서는 '제갈량이 사마의 때문에 근심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는 서술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배송지는 "무슨 제갈량이 사마의 따위를 걱정해서 피 토해서 죽었다는 말이냐. 헛소리다." 라고 단호하게 서술하질 않나,(진짜 저렇게 씀) 아예 제갈량전 같은 경우는 중간도 아니고 초반부터 자기 의견을 늘어놓으면서, "만약 제갈량이 중원에 있었다면 어찌 중달이나 진군이 적수란 말이냐." 라고 하지를 않나...
그런데 이런 배송지의 제갈량 평중에서도 특히 재밌었던 부분이,
제갈량의 군신(君臣-군주와 신하, 즉 유비와 제갈량)이 서로 만난 것은 가히 세상에 드물도록 생사와 화복을 함께하는 관계라 할 만하니 누가 그 틈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어찌 단금(斷金-쇠를 자를 정도의 단단한 신의)을 거슬러 주인을 고르는 마음을 품었을 것이며, 설령 손권이 그 기량을 다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거취를 뒤집었겠는가?
제갈량이 태어나 행기(行己-입신하여 처세함)함에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관우가 조공에게 사로잡혀 심히 후대 받았고 가히 그 쓰임을 다하게 했다 할 만하나, 오히려 (관우는) 의로써 그 근본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공명이 운장(雲長-관우)만도 못하단 말인가!
오나라의 중신 장소가 손권에게 제갈량을 추천했으나 제갈량이 거절하면서 "손권은 군주감이기는 해도 내 기량을 다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 손권의 부하는 안하겠다." 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배송지는 "이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때 제갈량은 이미 유비의 부하였고, 제갈량과 유비의 사이는 가히 보통 관계가 아닌데, 무슨 자기 기량을 쓸수 있고 없고 하는 식의 소리로 주군을 고르려고 했다는 것이냐. 조조 밑에 있던 관우도 그런 짓은 안했는데 그럼 제갈량이 관우만도 못하다고 하는 말이냐?"
하고 일갈 합니다. 뜬금없이 소환되어 제갈량 >>> 관우라는 부등호 놀이의 희생자가 된 관우...
한편, 몇몇 사가들은 아주 묘하게 기록을 바꿔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춘추 좌씨전' 은 중국에서 성인으로 모시는 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 에 좌구명이 주석을 달아놓은 것으로서 대체로 학자들에게는 사서를 떠나 경전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전의 내용을 묘하게 현재의 사서에 집어넣으려는 것인지, 요즘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되긴 하지만 지금 있는 사서의 내용을 춘추 좌씨전의 문맥을 빌려 묘하게 바꿔 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손성(孫盛)이라는 사람이 위씨춘추(魏氏春秋)를 쓰면서, 정사 삼국지에서 조조가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다." 라고 한 부분을 “유비는 인걸이니 장차 과인(寡人)의 우환이 될 것이오.” 라고 고친 적이 있습니다. 必爲後患가 將生憂寡人로 바뀐 것인데, 이건 B.C 475년에 해당하는 춘추좌씨전 애공 20년 기사를 취해 조조의 말을 손성이 고쳐놓은 부분입니다.
배송지는 여기에 대해 해설자로서 "이게 이런식으로 된 것이다." 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평론에서 한탄을 시작합니다.
신 송지가 보건대, 사서에 기록된 말은 이미 다수 윤색되어 예전에 기재되어 서술된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있고, 뒤에 지은 자가 또한 의도적으로 고쳐서 사실과 어긋나기도 하니 두루 까마득한 일이구나!
무릇 손성이 책을 지을 때 많은 부분에서 좌씨(左氏-좌씨전)를 채용해 원래 글을 고쳤으니 이런 것이 비단 한 부분이 아니다.
아! 후학들이 장차 어떤 곳을 취하여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위무(魏武-위무제)는 바야흐로 천하에 뜻을 떨치려 하는데, 부차(夫差)가 곧 죽을 운명에 처해서 했던 말을 쓰니 더더욱 그 그릇됨이 비할 바가 아니다.
이 기록은 조조가 원소와 붙기 전에 도망친 유비를 잡으러 가던 상황에서 나온 말인데, 손성이 베낀 bc 475년으로부터 2년 뒤에 '와신상담' 으로 유명한 오왕 부차는 사망합니다. 때문에 배송지는,
'진짜 이런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후학들이 대체 뭘 보고 믿을 수 있겠냐? 거기다가 지금 조조는 막 천하에 뜻을 펼치려는 순간인데, 베껴놓은 글은 딱 2년 뒤에 구천이 부차를 죽여서 부차가 죽을 운명에 처했을 즈음의 글이네. 진짜 어이가 없다.'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또한 촉나라의 장완, 비의 등을 평론할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이 사람들은 반듯하고 위엄이 있고 너그러워 변경에는 근심거리가 없었지만 작은 나라의 정치가로서 도리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고 평론합니다.
그런데 배송지는,
"지금 (진수가) 그들을 비판하여 미진(未盡)하다 하면서 그 (구체적인) 사건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으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
즉 "진수가 그 사람들을 비판하여 미진했다 하는데 대체 구체적으로 뭐가 미진했다는거냐. 기록만 보면 나라를 잘 다스리고 낙곡에서 대국의 큰 군대를 막아서 나라를 보존하고 잘한 일들 뿐인데 그런 사건이 있으면 분명히 드러내서 말해야지 그냥 덮어두고 미진했다 하니, 읽는 이로 하여금 대체 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평하는데, '읽는 입장으로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는 표현이 뭔가 생동감 있게 와닿아서 재밌었습니다.
배송지는 일전에 기록을 작성한 남긴 원위 등은 물론이고 손성 같은 사람들의 평론을 "예끼 븅/신들 헛소리 한다 쯧쯧" 하는 느낌으로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잦았는데, 어쨌든 그 사람들의 평론을 남겨놓고, 다시 자기가 그 뒤에 평론에 평론을 붙여서 재차 비평하는 형태를 자주 취했습니다. 때문에 정사 삼국지를 보다보면 원문 - 여기에 대한 평론 - 그리고 그 평론에 대한 배송지의 평론 - 이런식으로 따박따박 이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때문에 보면서 무슨 댓글놀이 하는듯한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도 재밌는 부분입니다.
건안 19년(214년), (유비군이)진격하여 성도(成都)를 포위했는데, 유장의 촉군태수 허정(許靖)이 성을 넘어 항복하려 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성사되지 못했다. 유장은 위망(危亡)이 가까이 닥쳤으므로 허정을 죽이지 않았다. 유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한 뒤 선주는 이 일 때문에 허정을 박대하며 임용하지 않았다.
법정이 설득했다.
- "천하에 헛된 명예를 얻었으나 그 내실이 없는 자가 있으니 허정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공(主公)께서 바야흐로 대업을 시작하려 하며 천하인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데, 허정의 허명이 사해(四海)에 널리 퍼져있으니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으면 천하인들은 이를 들어 주공께서 어진 이를 천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의당 그를 경중(敬重-공경하고 중히 여김)해 원근의 사람들을 현혹하여 옛적 연왕(燕王)이 곽외(郭隗)를 대우했던 일을 뒤따르십시오.”
이에 선주가 허정을 후대했다.
정사 삼국지에서 유비군이 유장을 항복시킬떄, 허정이 유장을 버리려다가 실패한 뒤, 유비가 유장을 항복시키긴 했으나 "허정 그 놈은 자기 주인도 버리려던 놈인데.." 하고 탐탁치 않아 하자 법정이 "옛날 연나라에서는 아무짝에도 없는 곽외를 잘 대해주니 군웅들이 '곽외 따위도 그런 대접을 연나라에서는 해주는데 나에게는?' 하고 왔던 일처럼 하시지요." 라고 발언한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손성이,
손성(孫盛)이 말했다 – 무릇 현인을 예우하고 덕을 숭상하는 것은 나라의 긴요한 도리이고 봉묘(封墓)하고 현인을 대접 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궤범이다. 이 때문에 빼어난 행실을 본받고 높은 의로써 세상을 뒤덮은 연후에 가히 오래도록 사해를 주시하며 뭇 사람들을 진복(振服)시킬 수 있는 것이니, 존숭되는 자가 만약 그 사람됨이 아닌 자라면 그 도는 행해지지 않는 법이다.
허정은 집에 있을 때는 벗과 불목하고 출신(出身)해서는 처해서는 안 될 지위를 받았으며, 신의를 말하며 마음을 바꾸고 견식을 논하며 위태로운 허물의 으뜸이 되었으니, 어찌 먼저 그를 높여 다른 이들을 감격시켜 불러 모을 수 있겠는가? 부허(浮虛)한 자를 이처럼 존숭하여 영예를 투박(偸薄-경박)하게 하였으니 곧고 의로운 선비들은 장차 어찌 예우하겠는가? 법정이 현혹하는 술수에 힘써 귀상(貴尙-숭상)하는 기풍을 거스르고, (허정을) 곽외(郭隗)에 비유했으나 그에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애초에 국가를 다스리며 해야 할 일은 현명한 사람을 쓰는거지 무슨 어리석은 사람을 써서 술수를 쓰는거냐며 법정을 비판하고, 허정은 분명 하찮은 자로 곽외에 견줄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 일을 비판합니다.
그러자 배송지는,
/ 신 송지가 보건대, 곽외는 어질지 못한 자로 오히려 권계(權計)로써 은총을 입었다. 더구나 문휴(허정)는 그 명성이 일찍이 드러난 자로 천하에서 그를 영위(英偉)라 일컬었는데, 비록 말년에 결함이 있어 그 섬김에 있어 창철(彰徹-밝게 드러나고 투철함)하지 못했으나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면 어찌 원근을 미혹할 수 있었겠는가? 법정이 허정을 곽외에 비교한 것이 부당하다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손성은 봉묘 식려를 들어 비판하니 어찌 이토록 엉뚱한가! 그렇다면 연(燕) 소공(昭公) 또한 잘못인데 어찌 오직 유옹(劉翁-유비)만을 비판하는가? 벗과 불목한 일에 이르러서는 그 잘못은 자장(子將-허정의 종제인 허소)에게서 비롯되었고 장제(蔣濟)의 논의를 찾아보면 문휴의 허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손성은 그가 처해서는 안 될 직책을 받았다고 나무랐는데 혹 동탁 때에 벼슬한 것을 말한 것이라면 동탁이 처음 정권을 잡은 뒤 현준(賢俊)들을 발탁하여 그 책명과 작위를 받은 자가 숲처럼 무성하니 모두 그러하다.
문휴가 선관(選官)이 된 것은 동탁이 오기 전으로 그 뒤 중승(中丞)으로 승진하고 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를 들어 폄하한다면 (동탁 때 벼슬한) 순상(荀爽), 진기(陳紀) 같은 무리도 모두 세상에서 배척되어 버려져야 할 것이다.
배송지는 '곽외도 하잘것 없는 인간이었다. 반면 허정은 말년에 추해지긴 했는데 천하에 명성이 반대로 높았다. 법정이 허정을 곽외로 비유한게 뭐가 잘못되었냐? 그런데 무슨 반대로 허정은 곽외에 댈수가 없다고 하니 손성 이 인간이 참으로 엉뚱하다.' 며, '애초에 그거 가지고 비난하려면 연나라 소공도 잘못한 건데 그럼 왜 그걸 안 따지고 유비만 욕하냐.' 고 평가합니다.
또한 손성이 허정은 '벗하고는 사이 안 좋고 출사해서 얻으면 안될 자리를 얻었고...'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허정을 비판을 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뭔가 막연하계 "얘는 나쁜놈임." 같은 식으로 비판을 하자,
배송지는 '벗하고 사이 안 좋았던건 허정이 아니라 동생에게 비롯된 일. 이런저런 이야기들 찾아보면 그 정도는 알 수 있을텐데?'
'출사해서 얻으면 안될 자리를 얻었다는게 동탁 밑에 있었다는 거 말하는 소리냐? 동탁이 정권 잡았을때 지지자 얻으려고 자리 막 뿌려진 게 수두룩하다. 하물며 허정 경력을 살펴보면 동탁이 오기 전에 이미 중승이 되었고 동탁 오고 난 뒤에 그 이상으로 간 적이 없는데?'
라면서,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요즘 하는 말로 따지면 '팩트폭격' 을 합니다. 그렇게 팩트로 공격하면서 "손성 이 인간 참으로 엉뚱하다." 고 하는게 인상적...
여러모로 정사 삼국지를 읽을때 가장 재미난 부분이 배송지의 평들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배송지의 평을 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것이 역사가로서 역사를 '사실 그 자체' 로 쓰지 않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진상을 좀 흐려놓거나, 혹은 역사가가 임의로 내용을 비틀거나, 혹은 뜬근없이 춘추를 끌고오거나 하는 식의 행위에 대해서 배송지가 한탄을 하며 "사실을 그대로 쓰지 않으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거냐" 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경우를 상당히 자주 찾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저런 음흉한 정치적 목적에서 역사를 비트는건 물론이고, 설사 그게 무슨 교훈을 주기 위한, "역사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막 이런 식으로 역사로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의도라고 해도, 가장 우선이 되야 하는건 그런것이 아니라 '역사가는 오직 사실만을 써야한다' 며 역사 그대로를 기록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엄중하게 비판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한탄하며 분개하는 모습이 정말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 24사 중에서 송서(宋書)에는 이런 배송지의 열전도 있습니다. 그 배송지의 열전을 참조해보면, 배송지가 상서사부랑(尙書祠部郞)의 관직에 있을때 황제에게 이런 내용의 표문을 올린 기록이 보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세우는 비석에는 실제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너무나도 많다. 후손들이 사사로이 비명(碑銘)을 날조해서 만든게 명시되어버리고, 자신들의 자비로 그 공덕을 널리 퍼뜨린다. 이를 금지해서 막아야 한다."
후손들이 자기 선조들의 공적을 뻥튀기 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에 새길 약력을 자기 마음대로 써갈기고 그런 내용을 돈주고 퍼뜨리는 작태에 대한 비판 입니다. '오직 사실만을 다뤄야한다' 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배송지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 일이었을 동시에, 그런 배송지의 일생을 후세에 보는 입장에서는 "평생에 걸쳐서 그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고 지키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보면, 여러가지로 감명 깊은 느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