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역사적 유명 인물이고, "나는 황제의 팬이다." 라고 추종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현대까지도 없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수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고 굉장히 강렬한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이 무언가 걸출한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자타가 모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래서 그 걸출한 인물이 했던 세세한 일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평가가 공존합니다. 거의 반인반신처럼 추켜세우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까려고 마음 먹으면 정말 하루종일 365일 까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깔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적인 인물로서의 나폴레옹은 워낙에 많은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고 많은 평가를 받고 있기에 한두부분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사적인 영역으로 가면, 글쎄요....
물론 한 사람의 사적인 부분을 하나로 재단하는건 굉장히 극단적이고 어렵긴 합니다. 사람이라는게 무슨 게임 캐릭터처럼 하나의 면모만 있는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프랑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을 꼽으면 의외로 자국 내에서는 10위 안에도 못 드는 것과는 별개로 프랑스나, 또 그런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수없이 접한 유럽국가들과는 별개로 '프랑스 역사인물 = 바로 나폴레옹' 정도로 나오는 국내를 비롯한 제 3세계에서 가지는 나폴레옹에 대한 이미지, 그것과는 좀 괴리가 있다고 해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 나폴레옹 하면 떠오르는 긍정적인 이미지 하면, 대범하고 동시에 위트도 있고 막 부하들과 격의없이 농담하고 병사들 코나 귀를 잡아주고 그런 살갑고 정다운 이미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런 면모가 전부 거짓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나폴레옹의 전부인것도 결코 아니고, 그 반대의 면모에 대해서는 많이 가려지거나 혹은 잘 안 알려져 있곤 합니다.
인간 나폴레옹의 부정적인 면모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로남불' '자기 합리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행동의 원리가 내로남불로서 남을 욕하고 신랄하게 꼬집고 흠결 잡는 건 아주 좋아하는데,
정작 자기가 욕먹을 상황이 되면 말 번드르르 하게 하면서 죽어도 인정 안하고, 한참 지난 뒤에 그럴법한 소리로 터무니 없이 회고하면서 이후에 정당성이라는 환상을 새기는게 주특기 중의 주특기입니다. 행동의 원리가 내로남불이 되는건 대다수 인간들이 그렇겠지만 바로 이 정당성을 부여하는 솜씨가 나폴레옹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주특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그 난리를 치고 "다 잘되라고 한거다.. 이상한 놈들이 용감한 스페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서 결국 스페인 백성들을 위한 내 거대한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다... 아쉽다. 스페인 국민들은 그보다는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흑흑...." 뭐 이러는건 웃음 밖에 안나오고
모든 시도가 좌절되고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에서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서 자기가 무슨 유럽을 연맹 같은 식으로 엮어서 정신적으로 하나로 만들려는 장엄하고 열렬한 의지로 그 모든걸 하려고 했었다 이러고 줄줄줄 읆는걸 보통 보통 철면피가 아닌듯 싶고
자기가 당하고 여러 상황 등으로 고통을 겪는건 민감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사정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 남의 말은 죽어도 안듣고 뭣하는 상황이 되면 남에게 책임 전가에 주작은 그냥 기본 중의 기본 입니다.
드제의 희생으로 승리했던 마렝고 전투때를 보면, 이 전투는 군사학자들이 "나폴레옹이 자기가 했던 금언을 자기 스스로 어겼다." 고 할만큼 나폴레옹의 작전상 미스로 완전히 패망 할뻔 했다가, 드제가 이끌고 온 지원군 덕분에 겨우 구사일생했던 전투인데,
나중에 나폴레옹이 5번 이상 고쳐서 내놓은 공식적인 보고서만 보면 구원으로 구사일생한 부분은 교묘하게 얼렁뚱땅 넘어가고 흡사 드제가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그냥 움직인것 처럼 묘사하는데다,
드제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마르몽이 "드제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고 했는데, 죽은 사람이 말을 못하니까 그냥 자기 마음대로 드제가 죽어가면서 "아, 제일통령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죽으니 슬프다, 통령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시오." 라고 하는등 그냥 아예 마음대로 소설을 쓰는 수준에 이릅니다.
나폴레옹이 한창 때 국가 공적 문서로서 내놓고 발표했던 자료들이야 그런식의 양념이 쳐지는거야 당연히 말할것 없고, 우리가 나폴레옹의 일생에서 여러가지 일에 대해서 나폴레옹의 사적으로 느껴지는 의견과 시선들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나폴레옹이 패망 이후 세인트 헬레나에서 자기 일생을 스스로 회고하며 여러 가지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쓴 건 아니고 나폴레옹이 구술 하면 측근들이 이를 정리하는 식이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라스 카즈의 회고록 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여러 사건에 대한 나폴레옹 어록이라던지, 나폴레옹의 의견 대부분이 이 라스 카즈의 회고록이 출전입니다.
이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은 아주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미화 되어 나오고, 이것이 훗날 출간 되면서 전 유럽에 새삼 나폴레옹 붐을 다시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서는 나폴레옹과 라스 카즈의 관계가 아주 아름답게 나오는데, 라스 카즈 본인에게 약간의 충심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라스 카즈가 '나폴레옹 회고록을 써서 돈을 벌려고 세인트헬레나에 남았다' 고 의견을 보이며, 실제로 라스 카즈는 회고록 작성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자 갑자기 돌발행동을 일으켜 세인트헬레나에서 추방을 당하고 유럽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서는 아주 낭만적인 관계로 미화 되었던 나폴레옹과 라스 카즈의 관계인데, 동시기에 같이 있던 구르고의 회고록을 보면 나폴레옹 본인도 라스 카즈가 회고록으로 돈 벌려고 남아 있었다는건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신, 나폴레옹 본인도 그 라스 카즈를 글을 빌려 최대한 수많은 일에 대해서 "이럴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뜻이 있었다." 등등의 자기 합리회를 하는데 열중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그래서 이 라스 카즈의 글은 한때 유럽에서 거의 꺼졌던 보나파르트 열풍을 다시금 되살린 히트작이었지만, 현대에서 나폴레옹의 행적을 연구하고 하는 사람들은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사실관계에 대해 거의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의미를 둔다고 하면, 나폴레옹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도로 언급하는 수준입니다. 사실 관계로 들어가면 워낙에 자기합리화와 자기 관점에서의 재해석이 전부라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르고
당연하지만 라스 카즈가 떠난 이후에도 나폴레옹은 이런 덧붙이기와 역사 다시 쓰기에 몰두 했는데, 라스 카즈 이후로 이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구르고와 베르트랑이라는 두 측근이었습니다. 구르고의 회고록을 보면 라스 카즈의 회고록과는 좀 다른 적나라한 나폴레옹의 모습이 보이는데, 여기서 나폴레옹은 수도없이 회고록을 쓰자고 구르고를 닥달합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자신이 패배한 워털루 전투에 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현대에서 여러가지로 연구된 워털루 전투에 대한 대체적인 견해는, 전투가 펼쳐지기 직전의 단계에서는 분명 나폴레옹이 훌륭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일단 워털루 전투가 열리는 시점에서는 수도없는 삽질이 펼쳐졌다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수도없이 워털루 이야기를 꺼내며 '자기 관점에서 보는 워털루 전투 다시 쓰기' 를 하면서 최대한 삽질을 부하들에게 돌리거나, 혹은 엄연히 전투에서 승리한 웰링턴을 반대로 실수를 여러번 저지른 졸장으로 몰아가며 피장파장 작전을 쓰는등 열성적이었는데, 나중에는 하도 워털루 타령을 해대니 워털루 이야기만 나와도 구르고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1817년 3월 10일 월요일의 회고
세 시, 황제의 방. 황제는 심기가 불편하다. 내게 워털루 구술 정리를 마쳤는지 물으신다.
구르고: “폐하, 제가 너무 우울하고 몸이 아파서 못 했습니다.”
황제: “당신은 애나 다름없어! 내가 탄력이 붙었을 때 당신이 워털루를 마쳐야지.”
1817년 5월 20일 화요일의 회고
황제는 워털루 전투에서 자신이 왜 패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셨다. 황제는 선임장군으로 술트를 택할 것이 아니라 앙드레오시를 택했어야 했다고 하셨다. 황제는 술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술트는 참모들이 무능했고 겁을 내고 있었어. 18일 밤에 내게 여러 번 보고했는데, 겁을 먹고 있었어. 술트는 야심이 많지만, 그 마누라가 그를 가지고 놀았어.”
1817년 5월 24일 토요일의 회고
황제는 열 시에 나를 불러서 워털루에 대한 구술을 마치지 않은 것을 꾸짖으셨다.
1817년 9월 4일 목요일의 회고
일곱 시, 황제가 부르셨다. 워털루에 대한 구술자료를 찾으시면서 나를 꾸지람하시며, 자료를 찾아오라고 하셨다.
구르고의 회고에 나오는 워털루에 대한 집요한 집착들. 워털루에 대해서도 이 정도고 하니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나폴레옹 본인이 회고한 것에 대해서는 좀 걸러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르고와의 관계도, 라스 카즈의 회고록처럼 많이 미화된 회고록에서는 볼 수가 없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질척거리는 관계로 나폴레옹은 복종하라고 욕하고, 구르고는 내가 다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인간이 왜 나를 이렇게 무시하냐며 서로 대들면서 욕하고 서로 허구한날 헛소리 하고 말다툼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구르고가 자신과 똑같은 신세인 베르트랑에게 신세 한탄을 털어놓자, 이 베르트랑은 굉장히 나폴레옹에게 충직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얼마나 충직했는지는 아래 서술)
"이보게, 당신은 아직도 황제를 모르나? 황제가 의견을 묻는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 자신이 한 말에 남들이 동의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일세."
라며, 가장 충직한 지지자면서도 나폴레옹의 속내에 대해서는 이러려니 하고 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폴레옹과 최고로 콤비로 여겨지며 전쟁에서 참모 역할을 여러번 한 베르티에
이렇게 어떤 사건관계에 대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이 강한 나폴레옹이었는데,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타인에게 무심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아니, 무심하다기보다 공격적인 모습이 강했습니다.
가령 전쟁터에서 나폴레옹의 최고의 측근이라고 여겨지는 베르티에 같은 경우는 열받은 나폴레옹이 베르티에의 머리통을 잡고 벽에 다 찍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관의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자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말단 병사에 대해서도 주먹질로 코피를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인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주먹이나 채찍으로 두드려 팼고, 부인인 조세핀이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찢어버린다던지, 말메종 궁전에서 번식기에 접어든 동물을 '그냥 심심해서' 나폴레옹이 때려 죽이는걸 보고 조세핀이 지적하자 "말메종에는 모든 것이 왕성하게 새끼를 낳으니 아무 문제도 없소. 당신만 뺴고 말이오." 라며 자식을 낳지 못하던 조세핀에게 패드립을 해서 눈물을 터뜨리게 하곤 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을 여자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유명한 일화로 스페인으로 원정을 갔을때 "여자, 여자를 달라." 고 성화를 내다가 정작 불려온 여자의 체취가 묘하자(나폴레옹은 코가 굉장히 예민했습니다) 쫒아낸 일화가 있습니다. 물론 고금의 권력자들 중에 여자 안 좋아한 사람이 드물지만, 나폴레옹은 독특하게도 여자에게 모욕을 주면서 깔아뭉개며 지배욕을 채우는 면모가 있었습니다.
지금 기준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도 사교장에서 여자에게 바로 앞에서 외모가 어쩄냐느니, 오늘 복장이 별로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건 무례한 행위였지만 나폴레옹은 대놓고 외모 지적을 하면서 면박을 주는걸 즐겼습니다. 곧 갈테니가 옷 벗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놓고 하루종일 벌벌 떨게 해놓고 정작 가지도 않은 일화 등등도 유명하고...사실 그 정도는 다른 일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입니다.
마리 발레프스카
나폴레옹의 여인으로 유명한 것은 첫번째 부인인 조세핀, 그리고 두번째 부인이자 오스트리아 출신 황후인 마리 루이즈고, 그 외에 다른 여자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마리 발레프스카 입니다.
마리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이 폴란드에 정복자로서 입성할때 (폴란드를 해방시켜줄것처럼 여겨졌던) 나폴레옹을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 속에 있었던 여자로, 나폴레옹은 그녀를 보고 갑자기 뻑 가서 궁정대원수인 뒤로크에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와라." 고 요구 합니다.
수소문 하던 뒤로크는 드디어 찾았다고 나폴레옹에게 보고했었는데, 그런데 마리 발레프스카는 '마리아 발레프스카 백작부인' 으로 유부녀 였습니다. 남편은 일흔일곱 살의 노령이긴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들도 한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몸이 달아오른 나폴레옹은 '제발 폴란드를 독립시켜주길' 바라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만나 은근히 운을 띄웠고, 어떻게든 나폴레옹의 환심을 사야한다고 여긴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마리 발레프스카를 찾아갑니다.
당연히 마리는 처음에는 기겁하며 거부했지만, 폴란드 대표단이 심지어 침실까지 들어와서 폴란드를 위해 희생하라고 열변을 토하자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 가는 길에도 일부러 귀부인이 아니라 수녀처럼 입고 무도회에 나가 심경을 표시했는데, 나폴레옹은 여기서 눈치 없이 마리에게 말을 건 남자 장교 두 명은 머나먼 벽지로 좌천시켜버리고 편지와 보석을 줬지만 나중에 이를 열어본 마리 발레프스카는 "나를 매춘부로 아느냐" 며 이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힘을 가진 프랑스 황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매일같이 소리치는 폴란드 애국단에 못 이겨 결국 나폴레옹의 침실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긴 해도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다보니 나폴레옹이 별안간에 붙잡고 애무를 하려고 하자 거부의사를 보였고, 이쯤되자 매너 있는척 하는것도 지겨워서 화가 났는지 나폴레옹은 갑자기 시계를 땅바닥에 던져대며,
"자꾸 이딴식으로 나를 거부하면 네 조국과 함께 아주 짓밞아버리겠다." 면서 무슨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악당 같은 대사를 실제로 뱉으며 강간했습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당연히 그 침실에 함께한 제3자는 없으니) 마리아의 회고인데, 이를 완전히 믿을수는 없다고 여길수도 있지만 최소한 마리아가 이때 반항하는 모습을 하긴 했다는건 맞는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인트 헬레나 시절 나폴레옹이 본인 입으로도 마리아가 처음에 반항했다고 언급했기 떄문입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그냥 형식적으로 한거지. 흐흐.." 이렇게 그냥 마리아가 좋으면서 그랬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긴 했다만은, 마리아의 회고에서는 반대로 자긴 그 시점에서 기절했었고, 깨어나 보니 나폴레옹이 짐승 같은 모습으로 이미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리아가 딱히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는 쪽에 더 신빙성이 가는건,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과 어떻게든 관계를 가져서 출세해보려는 여자들이야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마리 발레프스카는 애초에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관계를 맺은 이후에도 거의 아무것도 요구한적도 없었던 사람이라 달리 빈 말을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위광을 등에 업고 한게 없는데 딱히 나폴레옹에게 접근해서 해놓고 나중에는 강간 당했다고 할 이유도 없고...
어쨌거나 팔자가 기구하게 된 이후 마리아 발레프스카는 이후 나폴레옹의 자식도 낳아주고 해서 어떻게든 정을 붙이려고 했고(이 마리 발레프스카가 자식을 낳은 일은, 단순하게 보면 권력자가 흔한 사생아를 낳은것이지만, 그전까지는 자기 쪽에 문제가 있어서 자식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이 사실 조세핀이 문제가 있었다고 깨닫고 그녀와 이혼을 하고 오스트리아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는 나비효과가 터집니다),
'첫눈에 반했다' 는 면모, 그리고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헌신적인 태도 때문에 이 관계를 매우 로맨틱하고 정신적인 관계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후 나폴레옹의 관심사가 새 여자인 마리 루이즈로 옮겨간 이후에는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 밖에 생각이 없었고,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뒤에 위로해주려 마리가 찾아와도 "괜히 여자 만나고 있으면 혹시 소문이 나서 마리 루이즈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거들떠도 안 봤으며,
나중에 엘바에서, 그리고 워털루 패전 이후 떠나기 전에 한번 보긴 하지만 세인트헬레나 가서도 조세핀이나 마리 루이즈 타령은 종종 해도 마리 발레프스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도 없었습니다. 더 웃긴것은 그래놓고 나중에 마리 발레프스카가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때는 또 갑자기 혼자 분개해서 성질을 냅니다...
베르트랑 장군
그러나 이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강간 사건 '조차도' 그냥 전근대 시절에 권력자가 할수도 있는, 그 정도로 본다고 해도 더 괴기스런 엽색행각이 있는데, 바로 베르트랑 부인에게 추파를 던진 일이 그것입니다.
베르트랑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세인트헬레나까지 황제를 쫒아온 몇 안되는 인물 중에 하나로, 황제에게 충성심이 깊고 모범생처럼 행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부인을 데려왔고, 베르트랑 본인도 가정적인 성격이라 같은 섬 생활 중에서도 부인과 같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수행원들은 모두 황제 자신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는 나폴레옹의 심기에 거슬린 동시에 워낙 모범생 타입이라 딱히 재미도 없어서 나폴레옹의 총애도 그다지 깊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까지 찾아온 수행원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라스 카즈, 구르고, 베르트랑, 몽툴롱 등입니다. 이 가운데 라스 카즈는 1년 정도 지난 후 강제 송환 되었고, 구르고는 나폴레옹과 여러차례 말다툼을 하다가 라스 카즈 다음으로 떠납니다.
이후 남은 몽툴롱과 베르트랑은 모두 기혼자로서 부인들 역시 세인트헬레나에 데려왔는데, 몽툴롱은 여러모로 약삭 빠른 성격으로 나폴레옹의 비위를 잘 맞춰 사랑을 받았지만, 베르트랑은 상당히 충직한 성격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는 성격에다 별로 교활하지도 못하고, 충성심 만큼 가정적인 성격이라 나폴레옹은 그렇게까지 베르트랑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몽툴롱 부인은 (남편의 묵인 아래)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정부 역할을 하면서 이미 만사가 끝장난 나폴레옹에게 즐거움을 주었는데, 그 몽툴롱 부인마저 혼자 섬을 떠나자 나폴레옹은 크게 상심 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거의 유일한 그럴듯한 여자인 베르트랑의 부인에게 마수를 뻗칩니다. 몽툴롱 부인 같은 경우는 남편의 묵인 아래 나폴레옹과 가까웠지만, 이 부부는 나폴레옹의 재산을 노렸다는 인상이 강하고(나폴레옹 본인도 아예 모르지는 않았던것 같지만 일단 지금 말과 육체로 즐거움을 주니 그러려니 한듯) 심지어 심한 경우엔 나폴레옹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등 좀 구린 면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거 없이 일반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베르트랑 부인은 황제의 이런 추파를 기겁하며 여러가지 변명을 대고 이를 튕깁니다.
부인이 자신의 잠자리 상대를 해주지 않자 분노한 나폴레옹은 베르트랑 본인 앞에서 그 부인을 매춘부라 비난하는것은 물론, 당시 나폴레옹이 싫어하던 의사인 앙토마르키가 베르트랑 부인과 붙어먹는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죽기 며칠전까지도 어떻게든 탐해보려고 집착을 보이며, "어떻게 그 여자가 나에게 몸을 팔도록 설득해보라." 고 하기까지 합니다.
베르트랑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자기 마누라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을 아주 덤덤하게 회고록에 기록했습니다. 베르트랑 본인의 황제에게 충성심이 깊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느낌은 자기 아내를 탐하려 드는 황제에 대한 분노나 증오보다는 '그토록 거대했던 인간이 이렇게까지 추해지나' 싶은 측은함이 엿보이는 인상입니다.
다음은 베르트랑 회고록에서 관련 내용들.
1821년 1월 1일
황제는 어제 저녁 앙또마르키 의사에게 나와 아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베르트랑 부인은 행복하지 못할 거야. 그녀는 위안거리가 필요하지만 갖지 못할 거야. 그녀는 돈만 좋아해. 그녀의 남편은 자기 재산을 잘 관리해서 행복하겠지만 부인은 그렇지 못할 거야.”
1821년 1월 31일
앙또마르키 의사가 나에게 자기 방에 들러달라고 했다.
말을 들어보니 황제가 의사 본인을 새벽 한 시에 불러서 거취를 결정하라고 했다고 한다. 외과의사로 남고 싶으면 남을 수도 있지만 황제는 어쨌든 그가 아니라 다른 의사를 요구한다면서, 황제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의술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황제는 의사가 몽똘롱을 본받아야 하며, 황제와 잘 지내려면 몽똘롱에게 잘 보여야 하며, 저녁에 베르트랑의 집에 가서 노닥거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의사에게 예의가 없다고 질책하고 좀더 공손하게 말하라고 했다고 한다.
의사는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황제는 정오까지 결정하라고 했다. 의사는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보다 유능한 의사를 오게 하시고 그 의사가 올 때까지 남아있다고 했다.
나는 의사에게 행동을 바꾸라고 했다. 황제가 의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의사에게 황제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베르트랑 부인에게 가는 것은 유산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간 것이라고 말씀드리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황제가 조만간 권좌로 복귀하면 의사에게 크게 베풀 것이며, 의사가 지난 일 년 동안 잘 해왔기 때문에 계속 잘 하면 된다고 권했다.
의사는 내 충고를 따를 결심을 한 것으로 보였다.
1821년 4월 9일
앙또마르키가 일곱 시 반에 황제의 방에 갔더니 황제가 대노하셨다고 한다.
“아침 여섯 시에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이 베르트랑 부인 집에서만 노닥거리고 있어!”
나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일곱 시 사십오 분에 가서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의사가 갈보년들과 놀아나고 있어! 그 놈은 갈보들과 앞으로 하고, 뒤로 하고, 입으로 하고, 귀로 해댄다고! 멍청하고 무식하고 잘난 체하고 명예를 모르는 자식을 쫓아내버려! 앞으로 아노트만 부르겠어. 몽똘롱과 상의해, 이제 앙또마르키는 싫어!”
황제는 이 말은 마르샹과 앙또마르키 본인 앞에서 하셨다. 황제는 또한 내 앞에서 베르트랑 부인이 갈보라고 대여섯 번씩 반복하셨다.
“내가 유언장을 썼어. 나는 앙또마르키에게 목을 매달고 죽을 줄을 사라고 이십 프랑을 남겼어. 명예를 모르는 인간이야. 내 곁에 라레, 드저네뜨, 뻬르시 같은 의사들이 있었다면 이 방에서 나가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았을 거야!”
“나는 참 불쌍한 인간이야! 당신들은 아파 보지 않았지. 마르샹은 아파 본 적이 없다고 했어. 몽똘롱은 아파 봤으니 그런 대로 아픈 사람을 대할 줄 알아. 우리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잘 간호해주셨을 거야, 그런데 여기는 아무도 없어.”
“어제 침실시종이 의사한테 내가 기다린다고 전달했어. 그런데도 그는 베르트랑 부인에게 가서 나오지 않는 거야. 침실시종이 우습게 되는 거지. 앙또마르키는 베르트랑 부인 집에서 하루 종일 보낼 거야! 그는 내 방에서 나가기가 무섭게 베르트랑 부인한테로 뛰어간단 말이야!”
앙또마르키가 나간 후 황제는 의사가 내 아내의 정부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침실시종들인 마르샹과 알 리가 있는 자리에서 황제는 내가 나와 아내에게 불명예스런 일을 조장하고 있다고 하셨다. 의사가 몽똘롱과 멀어지면서 내 아내와 가깝게 되었으며 예측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1821년 4월 21일
황제는 앙또마르키 의사를 불러 황제의 건강상태에 맞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셨다. 앙또마르키는 황제가 고기를 드시면 안 된다고 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셨다.
“군대에서 같이 당신을 몽둥이로 다스려야 해. 당신은 여자한테 빠져 있어. 성질만 있단 말야!. 당신은 아노트보다 훨씬 못하잖아... 그 사람이 좋은 의사인지는 모르지만 행동은 똑바르다구. 그 사람을 좀 배워.”
황제는 앙또마르키에게 이십만 프랑을 남기려고 생각했다가 유언장에 한푼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황제는 비날리 신부는 행실이 바르고 본분을 다했기 때문에 그에게 오만 프랑을 남긴다고 하셨다.
나폴레옹은 얼마 전에 앙또마르키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베르트랑 대원수가 자기 부인에게 몸을 팔도록 했어야 해. 대원수가 그렇게 결정했더라도 그 못된 여자가 말을 안 들었을 거야. 대원수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내 의견에 항상 동의하고, 불평이 없다는 거야. 몽똘롱은 불평을 해. 당신이 나서서 베르트랑 부인이 내 정부가 되도록 설득 해봐.”
의사는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원수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앙또마르키는 처음에 왔을 때 나와 내 아내를 아주 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대원수는 멍청하고, 황제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황제에 대한 애착 때문에 유배에 따라온 것이 아니며, 프랑스에 남아 있었더라면 다른 측근들처럼 사형 당했을 것이며, 그의 부인은 예쁘고 친절하긴 하지만 집 근처에 지나가는 모든 영국군인들에게 아무 데서나 몸을 주는 천한 여자라는 소리를 (나폴레옹으로부터)들었다고 한다.
앙또마르키는 그런 소리를 듣고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고 황제의 도덕성을 의심했다고 한다.
1821년 4월 26일
황제는 오늘 자주 기억이 오락가락 했다. 십 일 전부터 하루 두세 번 씩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내 아내가 내가 걱정이 되어 왔다가 황제의 방에 두 시에 들러서 한 시간 동안 있었다. 몽똘롱이 황제에게 베르트랑 부인이 들렀다 갔다고 했더니 황제는 이렇게 (몽똘롱에 의하면)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는 못 봤어. 감정이 북받칠까봐 겁이나. 나는 그 여자가 내 정부가 되지 않은 것에 유감을 갖고 있어. 단단히 교육을 시키고 싶기도 하고.”
“몽똘롱 당신이 그 여자의 애인이었더라면 나는 당신을 날강도 취급했을 거야.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 많이 베풀지도 않았을 거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안 했어.”
“앙또마르키는 내 정부가 되기를 거부한 여자를 치료하고, 그 여자에게 내 정부가 되지 말라고 종용한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내가 회복하든 죽든 그 여자를 한번 볼 거야.”
내 아내는 몽똘롱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내 덕분에 (나폴레옹이 사망하고 자기 돈을 베르트랑 몫대신 몽툴롱에게 많이 넘겨줄테니)부자가 된 줄 아세요!”
황제는 저녁에 대여섯 번이나 마르샹에게 내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날로부터 정확히 10여일 후에 사망합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보이던 무서운 집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영웅으로 여겨지던, 리즈 시절인 통령정부 시절의 나폴레옹.
그래도 통령시절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비록 중요한 일의 결정은 다 자기가 한다고 해도) 남들 말도 좀 들어주고 경청도 하고 덜 윽박지르고 하는 듯 하며, 가까이서 나폴레옹을 지켜본 여러 인물들도 1차 이탈리아 원정부터 통령 시절까지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황제가 되고, 특히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상대로 모두 승리한 이후에 두 나라의 군주들을 모아 회담했던 틸지트 조약 이후에는 오만과 자기 중심의 결정체가 되어서 그 무렵의 나폴레옹을 묘사하는 주위 사람들의 여러 기록을 보면 "야..진짜 같이 있기 힘들겠다." 싶더군요.
워낙 성격도 급하고 변덕도 심하면서도 매사에 전부 오직 자기만이 주관해서 하려는건 많아서 심지어 파티 같은걸 해도 "자, 여기서 이걸 해서 이 순서대로 즐겨라!" 는 식으로 무슨 북한군 사열식 하듯 해서 나폴레옹 본인 등장이라도 하면 파티장 분위기가 갑자기 굳어버리고 떠나면 사람들이 화기애애 했다고 할 정도니...
문학 작품 기준에서 따지면 제가 여러가지로 본 나폴레옹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건 국내에도 나온 피에르 랑보의 소설 '전투' 에 나오는 모습이 가장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모로 비범하고 남들을 위압시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끝없이 졸렬하고 한없이 자기중심적이고 남이야 어찌되던 알바 없고 그런.... 그런것과 별개로 저 소설은 전쟁터에서 사람 정말 부질없이 죽어나가는 모습 잘 묘사해서 영웅적인 미화 없이 저 시대 전투 느낌 잘 살린 인상이라 개인적으로도 추천합니다.
그 외에도 나폴레옹을 다루는 프랑스나 그외 유럽의 문학 작품 몇개를 보면 그런 모습이 적지 않게 묘사 되기도 하는걸 보면, 그쪽에서는 나폴레옹의 이런 느낌이라던지 이미지가 딱히 새로울것 없이 많이 퍼져서 긍정적인 이미지와 상충 되는것 같은데(앞서 말했지만 프랑스에서 인기 있는 위인 순위 같은거 뽑으면 의외로 나폴레옹의 순위가 10위에도 못 든다거나)
반면에 한국, 일본 등에서 언급될때는 저쪽 사람들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그런 느낌이 거의 혹은 아예 없다시피 하는듯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이 (공적인 평가와 별개로) 가장 맑고 긍정적으로 묘사 되는건 자기 나라인 프랑스나 이해 당사지인 유럽이 아니라 제 3세계가 아닐지...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9-09 10:43)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