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모든 가능성에 대한 이론 (The Theory of Every Possibilities)
안녕하세요.
입을 열고, 뇌를 가열하고, 키보드를 누르면 헛소리만 하기 위해서
닉네임을 헛소리(=Farce)라고 지은 파스라고 합니다.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어..
흠흠. 이게 아니군요.
2월이 지나가기 전에, 2월의 이란 이슬람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 달 가까이 온갖 페르시아어, 아랍어, 영어 이름과 개념이 나오는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현대 이슬람의 현주소를 한국인도 읽기 쉽게 쓴다는 너무나도 야심 찬 프로젝트가,
끝끝내 갈 길을 잃고 표류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버렸습니다. 흑흑...
잠시, 한 이틀 경건하게 PGR을 끊고 미혹된 마음을 정리하고,
보다 보편적이고, 오직 저만이 할 수 있을, 저 같은 주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저 같은 주제.
[과몰입과 가능은 어떠하신지요?]
자 일단, 제가 워낙 인터넷 방송을 애호하는 사람이라,
이런 '특정 분야 팬'분들이 좋아하는 단어를 막 던지고 글을 시작하면, 신중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일단, "과몰입"이라는 표현은 '가상에 불과한' 게임을 하는데,
인터넷 방송인이 되었던, 인터넷 시청자가 되었던,
갑자기 "으아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말도 안 돼!"
하면서 비분강개하는 순간, 갑자기 혼자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던 한 친구가,
던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건 게임인걸요!"라고요.
뭐 사람 말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더 의미가 확장되어서,
네가 말하는 그 정치인이 네 친구냐, 같은 용도로도 쓰일 수 있지만,
일단 제가 제시하는 시작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이번 역은 가능. 가능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비슷한 동네(?)에서 자주 쓰이는 "가능"이라는 표현은,
본래는 조금 성적인 의미로 쓰이던 표현이라는 것을 밝혀야겠습니다.
그런 개념(?) 또는 대상(?) 하고도 육체적인 관계를 하고 싶은 마음가짐이 드냐?
라고 반문하던 의미로 쓰이던 표현입니다. "~~라면 (관계가) 가능하냐?" 라는 형태로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가능하다'라는 어감이.
[이런 것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라는 재미있는 어감이 있는 것 같아서,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세상에 존재하는 게) 가능하지 않아?'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용례를 아시는 분이라면, 깜짝 놀라시기도 해서, 조금 조심스럽게, 천천히 설명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처럼요.)
그런데 어떻합니까. 제가 요즘 친구들에게
"올 때 메로나"라고 말하면, 그 친구들이 "너는 언제적 유행어를 쓰냐!" 질겁을 하는데,
솔.까.말. 저는 유행어를 상당히 늦게 받아들여서 오래 쓰는 나쁜 버릇이 있거든요.
그것도 저만의 의미로 말이지요. 하!
아무튼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살리고 싶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가 너무나도 즐기고,
죽는 그 순간까지 교단에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돈을 벌다가 갈때 가고 싶은 소박한 사람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아주 역사 속에서 오래된, 과몰입과 가능의 역사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아니, 이런 것도 역사 이야기를 찾아가서 들어야겠느냐고요?
[재미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단 제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곰곰이 생각해본 것인데요.
"몰입감 있는 스토리와 어떤 대상을 좋아할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바로 "이놈!"하고 튀어나올 할아버지가 한 명 생각나더군요.
[바로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플라톤"입니다.]
아시다시피, 플라톤이 존경하는 선생님 소크라테스가,
'세상에 없는 것'을 아테네라는 동네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친다면서,
사형을 선고받고, 사약을 들이마시고 죽었거든요.
[누가 소설을 쓴다는 소리를 냈냐 이말이야!]
그래서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된 기념에,
그리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배운 사람의 철학을 밝혔습니다.
"시인추방론", 세상에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서 글로 싸재끼는 놈들은 암적인 존재니까.
애초에 교양있는 그리스에 발도 붙이질 말아야 한다!
하지만요. 하지만요. 플라톤 선생님.
시인들은 (여기서 시인은, 시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음유시인, 음악가, 이야기꾼을 다 포함한답니다.),
어떤 만들어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잖아요?
아무리 올림포스 12신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야기꾼이 말하는 데로 '과몰입'을 할 것 같진 않은데요?
아무리 슬픈 전설이 있어도, 그런 전설 같은 건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요.
[잘 될까 봐 그래.]
플라톤이 직접 기록을 남기기를: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보아라.
죽은 사람들이 가는 저승세계 '하데스'를 얼마도 생생하게 그리는가?
정말 끔찍하고, 무릇 산 사람이라면 죽은 뒤의 세계가 두려워지며, 신들을 공경하게 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리스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이 필요하다.
호메로스의 뛰어난 이야기가, 온 그리스에서 칭송받아서 모두 그런 이야기를 섬긴다면,
누가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두려움을 떨쳐내고 창과 방패를 들어 그리스를 지켜낼꼬?"
플라톤은 문학 작품에 대해서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미가 있으니까, 문제라고 했지요. 알아 몰입감 쩌는거. 근데 그거 다 가짜 몰입감인데 어쩔 거야?
인생을 안 살아줄거야?
다행히도, 플라톤은 언젠가 나이 들어 죽었고.
그제야, 그 밑에서 공부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님을 여의고 쓴 책 "시학"으로 우리 편을 들어줍니다.
"몰입이야말로, 문학 작품의 핵심이다."
[몰입 on!]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유명한 '카타르시스'라는 그리스 표현을 만들어냅니다.
재밌는 작품을 보면, 키아. 하면서 기분 좋은 거요.
그리고 이게 어떻게 사람 기분을 좋게 했냐? 관객이 몰입했으니까 가능한 거거든요.
"시학"이라는 책이 고대의 난리 통에 반쪽이 훌렁 날아간지라,
희극에 대한 부분은 소실되고, 비극에 대한 부분만 남았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 연극을 자주 보는 관객은 비극적인 일이 닥쳤을 때,
"그럴 수도 있지"라는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그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에 대한 자기 생각도 같이 껴넣습니다.
"야 근데, 몰입을 방지하는 턱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아니 그리스 신화의 괴물이 나와서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자가 갑자기 회개하고 돈을 뿌리거나, 예쁜 여자가 영웅에게 그냥 꼬이는 이야기!
그래. 차라리 신께서 점지해주신다면 모를까. 설득력이 떨어지면 몰입이 안 되어요, 안돼!
머리 10개 달린 히드라가 나오는 이야기도 '가능'해. 차라리 그런 이야기가 분위기를 더 살리고,
주제의식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있을 수는 있는데, 가능성이 낮은' 평범한 줄거리보다,
더 상급이야, 상급! 잘 만들기만 하면 나는 상관없어!"
라고 무슨 유명 방송국의 피디가 인터뷰하듯이 말이지요.
때는 바야흐로 흘러, 중세시대.
중세에는 성경책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과몰입은 성경책과 가톨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성인을 본받으십시오. 이게 일개 사람입니까?]
인간을 뛰어넘고, 인간을 포기해야지 칭송받습니다.
범인처럼 배가 고프고, 욕망을 가지고, 욕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음식이 없어도, 이부자리가 없어도, 승리합니다.
[그게 바로 중세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수피들의 '사마잔'이라는 춤은, 나약한 상태인 제정신이 아니기 위해서 사용되는 수양법입니다.
즉 제정신이란 '불가능'이었습니다.
불만 있어요 Layman (평신도)?
아니면 튀어 오시오. Inquisition (이단심문).
당신 같은 이교도 also 화형 가능 possible .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이 탐구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의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피디님! 당신이 목놓아 기대하시던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 같으면서도, 성경 이야기 같지 않은 오묘한 단테의 "신곡"이 등장했지요.
분명 배경은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것 같은데, 뭐이리 고대의 괴물들이나 이교도들이 많이 등장하고,
또 주인공의 통속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무리, 천당과 지옥과 신의 사랑이라는 교회에서 좋아라할 주제가 섞였다지만)
공식 삽화까지 포함된 '멋진 소설'로 등장했지요.
그렇습니다. '소설'이요. 성경에 대한 탐구도, 학술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통용되던, 과학기술 서적도 아니고요.
아니 이 불경한 책은 도대체 뭐지요? 악마가 좋아할 만한 욕망의 가능성은 도대체 누구 발상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활판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래로 보급되었기에,
재미있는 책이라면 아무나 전부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면, 작가, 독자, 그리고 또 뭐가 하나 더 등장해야 했을까요?
[크흠. 불편하군요. 이걸 글이라고 썼습니까, Writer? - Samuel Johnson]
그렇습니다. 바로 비평가들이었지요.
위 사진의 더러운 눈매를 가진 (지독한 근시였습니다.) 사무엘 존슨 같은 평론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존슨은 '하도 말을 되는대로 쓰니까. 답답해서 내가 영국 최초의 영어사전을 편찬한다."라는 업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작품과 작품에 대한 서평을 원고료 내고 받아주는 신문, 잡지가 등장했지요.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uneducated라고 부르기 바빴답니다.
이 분야의 선구자로는, 초기 비평가로서보다
애덤 스미스의 절친한 친구로 유명한 데이비드 흄도 있었습니다.
흄의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훌륭한 인터넷 싸움꾼이 되었을 겁니다.
왜 이리 자기 기준이 확고하고, 기준을 만들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지 원.
"자기 기준을 못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네, 아직 자네 견문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흠흠! 하지만 이런 비평가들이, 수많은 작가들의 피, 땀, 눈물을 다 가져가아아아 꿀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분명 비평가들이 '걸러야 할' 이상한 작가들도 쏟아진 것도 사실이거든요.
[영국에서는 "Penny Dreadful" 즉, "한푼짜리 짜릿물".]
미국에서는 "Pulp Fiction" 즉, "싸구려-종이 소설"이라고 불리는,
"양산형-말초-판타지-괴담-탐정-괴물-모험-소설"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잘 하는 게 무엇이냐면, 한 마디로 요즘 웹툰이었습니다.
아니 요즘 웹툰이 과거의 페니 드레드풀이고 펄프 픽션이겠지요.
매 화마다 관객의 호응으로 연재가 되니까. 절단신공을 남용하고,
소장본, 단행본으로 이어보면 이야기의 흐름이 죽여주며(?),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커가는 새나라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하나도 될 리가 없는 '재밌는' 소설이었습니다.
[나는, 나는 호레이쇼 앨저 (Horatio Alger). 왜 나를 싫어하나?]
그나마, 이런 장르소설 말고도 다른 책을 써서 성공한지라 기록이 좀 남아있는 인물로는, 호레이쇼 앨저가 있습니다.
미국 양산형 소설의 대가로 매번 비난하는(?) 용도로 소환되니, 본인은 무덤에서 좀 아쉬우시겠지만,
어떡해요. 21세기가 되어도, 앨저 작가님 글에는 문학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게 계속 발굴되는데...
호레이쇼 앨저는 그 시대의 다른 책보다는 그나마 '도덕적'이었습니다.
앨저의 책들은 미국에서 한동안 '청소년 권장도서'였거든요.
그게 말초적 재미조차도 없는, 교훈적이고,
애들은 노력을 안 해! 노력하면 다 성공하는데! 라는
철부지 부모님들 코 묻은 돈의 수요에 기생하는 작품들이어서 문제였지요.
앨저 같은 경우에는 계몽주의 시대 특유의,
"엣헴. 이게 계몽적이지! 이게 바로 미국적인 책이다!"
라는 '책으로 정상적인 사람 만들기'라는 시대의 돈이 되는 유행의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이 시대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시대냐면,
제가 맨날 소환해서 비웃는, '왓슨 행동주의 (Watson behaviorism)'를 믿던 시대입니다.
"백인이랑 다른 미개한 인종이랑 다른 게 뭔 줄 알아?
'똑바로' 몰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어릴 때부터 가르치면,
범죄도 안 저지르는 훌륭한 시민이 될 자질이 있다는 거야.
이상한 짓을 하면, 그거 흑인 같은 다른 피가 섞인 거야. 내가 알아."
물론 진짜 진정한 작가들은, 시대 유행에 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갈 명작들을 남겼지만요.
영국에서 딱 앨저처럼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교훈담긴 소설을 썼으나,
앨저와 달리, 글에 날카로운 문학성이 있었고, 정치적인 통찰력이 번득였던 "찰스 디킨스"가 있었듯이요.
여러분께서도, 앨저는 처음 들어 보셨겠지만, 디킨스는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엄숙한 계몽주의에는 소설들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과몰입할 수 있는 재미는 '가능'의 편이었습니다.
프로이트님 입장해주세요.
["인간은 진화한 고깃덩어리. 무언가 좋다고 느낀다면, 육체적/성적으로 쾌감을 주기 때문. 내가 알음. 내가 해봄."]
아무튼 간에, 별 해괴망측한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1만 시간의 법칙을 준수하려는 것인지,
'괜찮은 책'이 한두 개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교훈적인 책"을 너무나도 경멸해서, "글은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으니 쓰는 거야"라고 주장하는
낭만주의자, 즉 로맨티시스트들은 온갖 '로맨스' 소설을 쓰면서
달달한 연애. 독자의 감정 자극하기, '비주류 정서' 등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네? 잠깐만요? 왜 갑자기 '비주류 정서'가 나와요?
네, 독자님.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왜냐면, 이 로맨티시스트분들이,
'야 네가, 역사적 영웅. 모범적 범생이면 사랑을 알아?' 하면서,
독일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혈기 넘치는 Germany 젊은이,
센티멘털한 내면의 미소년 소공자 같은 소재를 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소설들이 후기로 갈수록 뭔가 찝찝하고, 병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거든요.
[영국에서 제일가던 로맨티시스트 작가, '퍼시 비시 셸리'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늙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글을 많이 적었고. 29살에 뱃놀이 사고에서 익사하는 것으로,
전설이 되었던 인물이지요.
반면 둘째 부인이자, 미망인으로서 훨씬 오래 살아야 했던 메리 셀리는,
퍼시가 이미 죽기 전에 자신만의 소설을 내서 유명해졌는데요.
다름 아닌, "프랑켄슈타인"이었습니다.
'로맨틱'한 소설을 실험해보는 과정에서 등장한 '괴기 SF'였고,
실제 소설은 사실 요즘 '무서운 괴물의 등장'에 집중하는 해석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릅니다.
생명을 경솔하게 창조할 수 있는 과학자 '아버지'와,
자신이 불완전한 것에 분노하는 '아들'의 (부정적인) 정서적 '교감'을 다루려고 했던 메리의 노력이 느껴지지요.
그리고 '교감'을 다루는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로맨티시즘과 함께 '가능'의 시대가 왔습니다.
미국에서, 로맨스 소설도 잘 쓰고, 괴기 소설도 잘 쓰고, 심지어 '공포 소설'을 '팔리는 상업적 장르'로 만든 에드거 앨런 포우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글을 잘 쓰냐는 질문에 이렇게 글을 써서 대답했습니다.
"
[T]he death,then, of a beautiful woman is unquestionably the most poetical topic in the world."
(자신의 유명한 싯구 Nevermore가 등장하는 시 "갈까마귀 (The Raven)"를 설명하며:
여기서, 아름다운 여자의 죽음이란 정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세상에서 가장 시의 주제로 쓰기 좋은 소재이지요."
정말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군요.
[선생님의 취향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인 애드거 앨런 포우와, 아일랜드계 영국인 오스카 와일드는,
뭔가 이상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와일드가 말하기를 "예술은 용도가 있는 물건 같은게 아니다."라고 하면서,
내가 너에게 감정을 주입하면 어쩔건데? 이런 묘사가 가능한 글씨라는 게 참 무섭고도 대단하지 않아?
왜 막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데도 너는 믿고, 너의 감정이 움직이지?
어디까지 내가 실험을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내가 널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섬뜩한 예술관을 주장했습니다.
["작품의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가능한가? 무엇까지 가능한가?"]
괴상한 소재, 공감이 불가능한 비정상적인 '소수자'로서의 주인공,
흉측하게 생긴 괴물(을 묘사하는 장면), 독자에게 충격주기,
금기에 대한 반항 ('배덕감'), 자극을 주기 위한 선정성과 폭력성...
["Art for Art's Sake"라고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것은,]
자극을 위한 자극, 극단을 위한 극단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던 것이었지요.
실제로 와일드의 사생활은 정말 락 음악이 발생하기 전의 원조 '락스타'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동성애'라는 죄로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고, 출소 이후 곧 사망한 것은 유명한 일화고요.
(그 과정 중에, "레딩 감옥의 노래"라는 시집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포우와 와일드 모두 장르소설의 대가였습니다.
연애 소설, 추리 소설, SF소설, 공포 소설, 야한 이야기, 못 쓰는 게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소설은 몇 가지 장르에 걸쳐있었습니다.
너의 상상력은 얼마나 '가능'한가?
나는 뭐든지 '가능'하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이 "퇴폐주의 (Decadence Movement)"적 발상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3가지 예시를 말하고 이 글을 끝마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제가 좋아하는 러브크래프트입니다.
[신은 죽었다. 왜냐면, 내가 신이 죽은 소설을 쓸 수 있거든.]
러브크래프트는 정말 끔찍한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아니 작가님, 왜 외계인은 자꾸 우주 저 너머에서 몰려오는데, 자꾸 황인종이랑 연관 지으시나요?
하지만 덕분에 그의 판타지는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여느 '판타지'와는 달랐습니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는 중세 기사도 문학과 '장르적으로 동일한' 장르문학이었습니다.
마왕이 있고, 악마가 설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신의 용사에게 파멸합니다.
진부하지요. 하지만 얼마나 진부한지 알아야 합니다. 유럽의 기독교만큼 진부한 것입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소설 역시 진부한 공포소설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 악마를 보았다! 무서워! 이래서 신을 안 믿으면 안 돼! 황인종 이교도들이 괴물을 소환한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사탄을 숭배하는 반기독교도의 발악'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천재였습니다.
정말 '별 괴상한 잡신이 나서서 판치는 판타지 문학'을 연재했고,
그는 판타지와 SF를 모두 포괄하면서 즐길 수 있는 배운 팬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은 글 속에서 결코 아름답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찔하게' 생겼지요.]
소설 속에서야 글로 적으면 큰일이 나고, 함부로 적힌 글을 읽으면 큰일이 나지만,
우리야 글로 읽고 '와 대단하다!'라면서 책장을 덮잖아요. 크크.
따라서, '러브크래프트' 자신의 소설이 편협했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만큼 재미있고, 더 깊게 논해볼 가치도 생긴다고 봅니다.
두 번째로,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그림]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 밑에 깔린 '일본식 정서'도요.
사실 이토 준지 작가님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싶지만,
음... 검색해보지 마세요. 이미지가 도저히 게시판에 올릴 만한 게 없네요.
이상하게도 저는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원점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요즘 '이런 것도 좋아하는 게 가능하니?'라는 질문에 쓰이는 것은,
앞서 말한 낭만주의 시대의 소설이 아니라 바로 '그림'이거든요. 그것도 '일본식 그림'.
도대체 "일본"과 "인류 문화의 '향유 및 창작의' 가능성과 한계"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요즘은 유행이 지나서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만들어낸 '모에'이지요. ]
요즘 모에하다라는 단어를 누가 씁니까?
그래서, 저는 쓰고자합니다. 역사를 기록하고, 모든 것을 분류하기 위해서요.
'모에선', '모에화', '모에빔'
현실에 존재하는 물체에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매력'을 주입하는 행위.
[군필자의 철학이 느껴지십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무덤에서 "일본인이야말로 '예술'을 할 줄 안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예술가는 '비주류 심리'를 가지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만듭니다.
당신들은 아름다움을 몰라.
하지만 나는 이것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어! 이것도 가능해! 저것도 가능해! 모두 가능해!
나는 실험실의 과학자이다. 아니 어디까지 나의 실험이 가능할까.
나는 인위적인 요소를 더하고 더할 뿐인데, 관객은 열광하고, 나의 결과물은 아름답다!
[내가 바로 위대한 예술가이고, 이것이 나의 걸작이다.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이다.]
일본 문학에 대해서 저는 크게 알지 못합니다만,
제가 항상 재미 읽고 있는 것이 일본에서 쓰인 소설들입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다 보면 이런 정서가 밑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친하다면,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제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른 시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PGR에 올라오는 제 글에는 많은 분께서
["하루키 같은 느낌이 드는 글을 쓰시네요."]라고 적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런 댓글의 의미를 분석하고, 피드백해야겠지요.
네, 저는 일본 소설을 많이 읽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법, 이야기를 쓰는 방법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가능성'을 변호하는 글을 이렇게도 길게 쓰는 것이고요.
깊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주관적인 취향에 대한 목소리.
"여기 사람 있어요."
저는 동시에 게이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본게임의 특정 장르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일본식 정서'의 한 종류가, JRPG 즉 일본식 턴제 알피지 말고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르를요.
[바로 "RPG 만들기 게임" (속칭: "쯔구르게임"입니다.)]
처음 들어보시는 장르라고요? 선생님 정말 다행입니다!
'쯔구르' 또는 'RPG 만들기 툴'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진 특정 프로그램으로 손쉽게 만들어지는,
일본 인디게임을 총칭하는 이름인데요.
이 분야에서 최초로 크게 성공했으며, 모든 다른 게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위의 이미지 "콥스파티"라는 게임입니다. 네, 제목부터 "사체파티"군요.
'RPG 만들기'라는 이름과 달리, 이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쉬운 어떤 종류의 게임은,
모험을 하거나, 턴제 전투를 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콥스파티"가 그렇게 성공한 게임이 아니거든요.
괴상한 장소에 갇힌 주인공, 위아래양옆 4방향 움직임, 빠르게 따라오는 괴물,
플레이어를 놀라게 하는 요소, 끔찍한 피투성이 게임오버 화면으로 찝찝하게 만들기,
병적인 등장인물들, 망측하고 극단적인 줄거리.
[대중적으로 유명한 이름으로는 "아오오니"가 생각납니다.]
에드거 알랜 포우가 살아있다면, 일본 인디게임의 거물이 되지 않았을까요?
'모게코'의 "회색정원", '미와시바'의 "라이잇"이야말로,
포우의 명품 단편소설, "갈까마귀", "검은 고양이", "어셔 가의 몰락"의 현대판일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모에'한 일본 그림체와,
병든 내면을 가진 화자의 믿기지 않는 스토리를 즐기는 일본 소설,
전혀 상식선을 지키지 않는 극단적인 '자극'을 뽐내는 일본 인디게임,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우와 오스카 와일드의 퇴폐주의 문학.
이들 모두가 공유하는 어떤 비슷한 정서가 엿보인다고,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현실에 없으니 '좋은 것이다',
'나는 그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표현에 있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주제는 수인입니다.]
꾸러기 수비대의 똘기 장군을 좋아하는 이유와, 피카츄를 좋아하는 이유는 똑같지요.
[현실에 있어도 참 귀여울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 없으니까 귀여운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인에 대한 사랑은 참 '2D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대한 사랑과 밀접합니다.
아 잠시만요. 수인은 이미 2D 그림이군요. 재미없는 말실수를 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도 애니메이션 좋아하는데' 또는 '추억의 애니메이션 주제가 BEST 10'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늘었다 쳐도
누가 실수해서 '안녕 나는 똘기가 좋아. 왜냐면 꾸러기 수비대는 내 추억의 만화영화거든"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안녕, 나는 똘기 장군이 좋아. 왜냐면 똘기는 수인이거든.] 이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요즘 시대가 시대고, 시국이 시국이라고, 말하기 힘든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
[저도 당신의 취향에 관심이 많습니다.]
라고 말하기 꺼려집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제 의식의 흐름을 따라오셨다면, 사실 여러분께서는 말하기 힘든 그 어떤 이유를 이미 아십니다.
"보통 수인은 성적인 의미를 가지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하크니스 테스트"는 오늘도 승리합니다.
잠시만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수인'은 상당히 21세기적인 개념입니다.
20세기 추억의 만화에 소급해서 적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영어로 "퍼리 (Furry)"라고 하는 이 특정한 개념에 대해서 논하고 싶습니다.
압니다. "퍼리"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고, 그분들은 항상 '퍼리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명을 씌운다!'라고 하지만,
일단 저도 "퍼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잠시 분노를 참고 제 말씀좀 들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오오오망한 니이이이이익!]
수인 캐릭터는 보통 2D 캐릭터입니다.
또는 다른 형태를 띠기도 하는데, 좀 투박하게 말하자면 '털옷', 업계표준으로는 '퍼슈트'의 형태를 띱니다.
네, 그냥 '수인 캐릭터'와 요즘 "퍼리"를 좋아하시는 분의 차이가 여기서 '별로 엄밀하지 않게' 뎅겅 잘립니다.
그리고 이런 걸 왜 좋아하냐면, 당연히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즐기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두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이라니까요?
사람 형태를 띤다는 것은 사람에 의해서 쉽게 모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고,
실제로 "퍼리" 그림은,
쉽게 "이프(Yiff)라고 (영어 어감이 더도 덜도 말고 못 볼 것을 봤을 때, 놀라거나 좋거나 아니면 둘 다여서 외치는 "어우야" 입니다.)
불리는 '수요 있는 춘화'가 되기도 합니다.
'몰입'이 쉽습니다. '야한 그림으로 그리기 쉬운 짐승' 이거든요.
[그러면 곧 누군가는 좋아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적어도 전, 이런 '끌림'이 불가능한 범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왜 굳이 수인 이야기를, 앞선 모든 이야기들과 함께 하고 있는 줄 아시겠습니까?
제 뇌에서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고 자꾸 사이렌처럼 크게 외치는 소리가 울려서 그렇습니다.
저는 제 후두엽이 타오르기 전에 어서 빨리 글로 모든 것을 다 적어야겠는 역사의 숙명을 지니고 있고요!
아! 어느새 다 적어버렸군요! 저는 이제 쉬어야겠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가 정리한 '과몰입과 가능성의 역사'를 읽으시고,
요즘 대중문화에 대한 여러분의 온갖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피드백은 아주 찰지게 해드리겠습니다! 저 이런 이야기 하는 거 너무나도 좋아하거든요!
'저 이런 것도 좋아하는데요'라고 아무 말씀이나 하셔도 다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들어는요!
과연 인간 취향의 바벨탑은 어디까지 나선력을 보여주고 우주 저편까지 향할 수 있을까요?
이상 3학년 전공수업 "비평이론학" 수업 필기를 마칩니다. 교수님 충성충성 ^^7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9-24 15:1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