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에서 몇 차례 일제강점기 관련 포스팅을 게재했지만, 사실 제 주된 관심 분야(전공이라기엔 멋쩍은 감이 있습니다)는 한국의 행정사입니다. 이번에는 마침 오늘 2차 논술형 필기고사 발표가 난 행정고등고시를 주제로 택해봤습니다. 사실 정통으로 이 주제를 다뤘다기보다는 그 중에서도 가십에 가까운 수석 합격자 근황이기는 하지만요.
지난 대선에서도 김동연 당시 후보(現 경기도지사)가 폐지 논의를 꺼내기도 했을 만큼 폐지 논의가 단골 주제인 행정고시는 짧게는 1963년, 그리고 직접적인 전신인 고등고시 행정과까지 포함하면 1950년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시험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전 포스팅에서 다룬 일제의 고등문관시험도 고등고시 제도의 사실상의 전범으로 작용했습니다.(물론 구 한국 시대에서도 문관전고소 주관 시험까지 역사를 올려잡으려면 잡을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조차 일제의 고등시험 제도를 그대로 따온 것이기는 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종종 언론 및 정부에서는 행시 수석의 근황을 조사하기도 하고, 또 최근 수석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에 관한 보도 역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보도의 동기는 일차적으로 가십거리를 찾겠다는 데서 나온 것이겠으나, 한편으로 행정고시라는 제도 자체가 일단 시험 합격과 함께 정부 중추 진입을 보장하는 만큼 시험의 높은 성적이 실제로 일머리를 보장하는지를 이들이 20, 30년 후 관계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증명한다는 의미도 있겠고, 최근 수석이 어디로 배치되는지를 통해서는 요새 공직 내 중추 간부로 성장할 사람들이 어떤 지향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도를 살펴보다 보면 막상 1대부터 65대까지 적확하게 정리된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특히 3급 공무원 채용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1960년대~1970년대초 행정고시 수석 합격자의 경우, 고위직에 올라간 사람들이 저마다 "내가 수석이요, 내가 최연소요"했기 때문인지 명단이 다른데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 기수의 경우, 통합 수석을 발표하기는 하는데 직렬별 과목 채점 방식이 달라 두 명 뽑는 교정직 등 소수직 수석이 통합 수석을 거머쥐는 사례도 종종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번 시험 당시의 자료(언론보도, 잡지 기획기사) 등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행정고시 각 직류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일반행정직, 재경직 중심으로 초대부터 65회인 2021년 현재까지의 수석 합격자와 근황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실제로 수석 합격이 어느 정도 높은 정무직 진입율(차관급 이상)을 보이고는 있으나, 한편으로 그것이 절대적인 성공의 보장을 지칭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시대마다 부처 등의 선택에 있어 선호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일반행정직처럼 여러 부처에 지망가능한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이하에서는 196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한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1960년대 : 행시 1회 ~ 행시 7회]
1963년 시행된 첫 행정고시는 앞서 말했듯이 3급 공무원 채용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망령처럼 떠도는 행시 폐지론의 원조가 군사정권 도입과 함께 시행된 고등고시 행정과 폐지 및 3급 공무원 채용 시험의 개시인데 사실 이때조차 이름만 바꾸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앞으로도 누차 반복되는 행시 폐지/개혁론의 데쟈뷰를 보는 듯 합니다.
1960년대에는 행정직과 재'정'직으로 구분하여 선발하였습니다. 구 고등고시 행정과가 행정직, 재정직, 외교직 및 비정기적 실시되는 교육직으로 구분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 3급 시험으로 바뀌게 되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외교직의 폐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외무부 신규 직원은 1963~1967년까지 주사 공채로만 선발하고, 사무관급 채용은 1968년에 부활. 외시 1회)
아울러 1970년대 초도 그렇지만 1960년대도 수석 합격자 명단이 부정확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행시 4회 수석으로 심대평 전 국민중심당 대표(민선 충남지사)를 언급하는 보도가 있으나, 일단 당대 언론을 보면 행정직은 최인기, 재정직은 박인주 씨가 수석입니다. 심대평 씨를 비롯해 이후에도 이런 사례들이 나오는데 아마 연수 수석 수료자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튼 1960년대 행시 수석 합격자 12명 중 7명이 차관급 이상에 올랐습니다. (58.3%) 같은 시기 행시 합격자의 차관 진입률보다는 상당히 높은 수치입니다. (35.0%)
이 시기 수석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IMF 시기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 금융개혁을 주도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일 것입니다. 다만, 이헌재 부총리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70년대 율산그룹 사태에 연루되어 중간 간부 시절 공직을 떠나 민간에 있다가 20년만에 화려하게 친정인 재경부로 컴백한 케이스임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1970년대 : 행시 8회 ~ 행시 23회]
위는 70년대 행시 수석 합격자 명단입니다. 주로 MB 정부 때 활약한 인사들이 많으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아 저 사람 들어본 적 있다 싶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1970년대 행시 합격자 중 정무직(차관급 이상) 진입 비율은 52.6%입니다. (70년대 합격자 전체 정무직 진입자 수는 정리 중인데 얼추 보니 수석 합격자 진입 비율보다는 낮은 것 같습니다.)
고시를 너무 적게 뽑아 오만 군데 다 굴렸던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 합격자는 압도적으로 재경부-예산처, 그리고 기재부에서 공직 생활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것이 눈에 띕니다. 1970년대에 입직했음을 고려하면 이들은 한창 한국이 산업화의 길에 들어서는 걸 목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는 대부분의 시기를 직류 구분 없이 통합 선발하였기 때문에 재정 관련 부처 쏠림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재경부-예산처-기재부를 선택하지 않은 수석도 있습니다. 이들은 산업부(이희범, 이윤호, 신동식, 정만원)를 주로 택했고, 그밖에도 내무부-총무처-행안부를 선택한 이들(오형환, 박명재, 권선택)도 있었습니다. 특히 권선택은 최연소 합격이면서 수석 합격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2017년 당선무효형을 받아 대전시장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정치 일선에 있어 70년대 수석 합격자 중 가장 최근까지 활동한 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권선택 전 대전시장
이밖에도 유능하다는 평판이 많았고 실제로 재경부 최고 요직인 금정국장(현 금융위)까지 올랐으나 바로 며칠 전 판결이 나기도 했던 론스타 사태에 연루되어 공직생활을 조기에 마감한 변양호 씨, 3시 패스로 일찍이 철강왕 박태준의 사위가 되는 등 화려하게 사회 생활을 시작했지만 끝내 정치도 일상생활도 뜻하는 바대로 풀리지만은 못한 고승덕 씨가 이 시기 수석 합격자입니다.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고승덕 전 국회의원
[1980년대 : 행시 24회 ~ 행시 33회]
80년대부터는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보입니다. 1982년부터는 다시 직류별 선발이 부활하였고, 일반행정, 재경직 외에 사회, 교육직, 교정직도 소수이지만 함께 선발하였습니다. 다만, 첫 재경직 수석은 당시 언론, 잡지 보도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없었고, 29회 재경직 수석 역시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행시 29회 재경직 차석이 홍남기 현 경제부총리인데 고시계 등 당시 언론에서도 수석 대신 차석인 홍남기 씨만을 인터뷰, 좌담회 등에 초청한 것으로 보아 수석이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볼 따름입니다.
80년대 수석 합격자 18명 중 6명인 33.3%가 차관급 이상 정무직에 진입하였습니다. 이 시기 전체 합격자 중 차관급 진입 비율이 18.1%임을 고려하면 다소 높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수석 중 서울대 비율은 50%로, 전체 합격자 중 서울대 비율인 32.3%보다 높습니다.
80년대 역시 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재부/금융위의 전신인 재경부, 예산처 등에서 커리어를 쌓은 수석 합격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행시 28회나 행시 31회의 경우, 일반행정과 재경직 수석 모두 이들 부처에서 한솥밥을 먹었습니다. 이밖에도 당시만 해도 이례적인 통일부에서 커리어를 펼친 엄종식 전 통일부 차관, 사시 합격 후 경찰로 전직한 최현락 전 대전지방경찰청장 등이 눈에 띕니다.
수석 합격과 별개로 뜻하는 바대로 커리어가 풀리지 못한 분들도 보입니다. 32회 재경직 수석인 이종국 씨는 지방대인 한남대에서 재경직 수석 합격 후 재경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였으나, 과로로 사무관 시절에 작고하고 말았습니다. 행시 31회 일반행정 수석인 이찬우, 재경직 수석인 송인창 씨는 모두 기획재정부에서 커리어를 마감하였는데 둘 모두 친정에서 차관은 달지 못했습니다. 이찬우 씨는 기재부 역대 최장수 차관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박근혜-문재인 정부 교체기에도 유임되었으며 김동연 당시 부총리의 신임도 받았으나, 지난 정부 경력이 걸렸는지 영전은 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있다가 문재인 정부 말기에 금감원 수석부원장을 맡았습니다. 정권교체 후 새 정부에서 차관 또는 금융감독원장 등 주요 보직 기용이 점쳐졌으나 형(이용우 現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정계에서 활동 중이기도 하고 기수가 지나치게 높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보직은 받지 못했습니다.
한편, 조기에 공직을 떠났으나 화려하게 친정으로 귀환한 이창양 現 산업부 장관의 사례 역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창양 장관은 상공부에 입부하여(입직 직후 모신 국장이 한덕수 총리이기도 했습니다.) 커리어를 밟다, 4급 승진 전후로 국비유학 기회를 잡아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연차를 뛰어넘어 산업부의 최선임 과장인 산업정책과장으로 발탁되었으나 상사 등과의 갈등으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퇴직하여 카이스트로 이직했습니다. 어찌 보면 유학에 지원된 국비가 허공으로 날라간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겠습니다만, 20년 후 산업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산업부가 원전 이슈, 통상 분리 이슈 등으로 여러모로 위기에 있었던 때이니만큼 총리 등과도 친하고 인수위에도 합류한 구원투수가 등판한 셈인데, 어찌 보면 좀 시간은 걸렸지만 산업부 입장에서는 국비 유학이 조직논리상으로는 최고의 투자 성과를 거둔 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창양 現 산업부 장관
[1990년대 : 행시 34회 ~ 행시 43회 ]
1990년대 역시 직류별로 선발하는 기조가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직 활발하게 실국장급으로 활약 중인 기수라 차관급, 1급은 각 4명 배출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국무조정실의 인기가 높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90년대~00년대 당시의 기사를 보면 국무조정실은 권력부처의 일종으로 인식되었고, 민지홍 씨를 비롯해 일반행정직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국무조정실 배치를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재경직은 기재부가 압도적이나 산업부, 국토부 등도 일부 보입니다. 기재부의 경우, 수석 출신이 기재부에서도 과장급 최고 요직에 해당하는 종합정책과장, 예산총괄과장 등을 역임하고 있거나 현재도 맡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42회 재경직 수석인 김명규 충북 경제부지사(별정1급)의 경우, 기재부 기획/정책 파트 최선임 과장인 종합정책과장을 역임한 후, 고향(충북 청주 출생)인 충청북도의 러브콜을 받아 별정직 지방1급인 충청북도 경제부지사로 며칠 전 임명되었습니다. 기재부로 사실상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모험을 한 셈인데 이후의 행보가 주목됩니다.
1990년대 기수에서도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처럼 재직 중 퇴직한 사례도 있습니다. 성해영 교수는 문화관광부에서 공직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문체부가 최고 인기 부처 중 하나이지만 당시만 해도 수석이 문광부를 지망하다니, 이런 느낌의 기사가 나온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0년대 : 행시 44회 ~ 행시 53회 ]
2000년대부터는 여성 수석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행시 44회 일반행정직 수석인 김신숙 씨는 여성이면서 지방대학(제주대) 출신이라는 당시만 해도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국방부에서 커리어를 쌓은 점 역시 이색적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의 병역제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일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병역 제도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괜찮은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0년대 수석 중 일반행정직은 국무조정실, 복지부, 문체부, 과기정통부 등 특정 부처의 강세 없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재경직은 대부분 기재부를 지망하였는데 아직 본부 과장 보직을 맡지 못한 분들이 꽤 보여 언론 보도에 종종 나오는 이 부처의 인사적체 현상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행시 50회 일반행정 수석인 박은정 씨의 근무 부처나 행시 46회 일반행정 수석, 행시 50회 재경직 수석이 누구인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고시계 등 전통 잡지가 이 시기엔 독자수 감소로 볼륨이 부실해지고 있는 반면, 인터넷 수험 관련 언론이 아직 태동기여서 컨텐츠가 충분치 않은 과도기여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자료에 누락이 많은 편입니다.
[2010년대 : 행시 54회 ~ 행시 63회 ]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 수석입니다. 특이하게도 필기 소숫점까지 같은 공동 수석이 2년 연속으로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행시 56회, 57회 재경직)
일반행정은 문체부의 최고 강세에 행안부, 국세청 등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재경직은 기재부가 강세이나 수석의 금융위, 공정위 등의 '이탈'현싱이 언론 보도에 자주 뜨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기재부, 금융위 등이 전반적으로 승진이 느려 대부분 사무관이나 문체부, 행안부 등에선 4급으로 승진한 케이스도 있습니다. 행시 57회 수석인 박경용 씨는 행안부에서 승진한 후 고향인 인천시로 파견, 글로벌도시기획단장(지방 4급)을 맡고 있습니다.
[2020년대 : 행시 64회 ~ ]
2020년대 행시 합격자는 아직 2회밖에 배출되지 않았으나 현재로서는 전원 서울대 출신입니다. 출신 학과가 종래 다양했던 행시 일반행정직에서 서울대 정외 출신이 2년 연속으로 배출된 것이 다소 이색적입니다. 임용 유예 등으로 인해 실제 부처에 배치된 수석은 김영찬 씨 1명이며 공정위를 선택하여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 https://www.sedaily.com/NewsVIew/22TUL411GG ) 이밖에도 이 글에는 없지만 3년 연속 최연소가 서울대 경제 출신인데 수석, 최연소 등 서울대의 강세가 이어질지는 앞으로 주목해볼 일입니다. 아울러, 2010년대 말부터 이어지는 경향이지만, 행정고시와 국회사무처의 입법고시를 중복합격할 경우, 국회사무처를 택하는 경향이 여기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