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부타 할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연히 '최영장군의 활약지도' 라는 자료(?)를 웹서핑 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게 되더군요.
저기 써져 있는 내용을 일일히 다 풀어쓰면
1345년 왜구 3천 격파
1348년 왜구 7천명 격파
1350년 왜구 1만 격파
1351년 왜구 1만 격파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길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최영전 첫머리부터 나오는 내용이지만, 최영은 젊은 시절 양광도 도순문사 밑에서 왜구를 몇명 사로잡는 무용담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인데(그것도 대단한것), 실제로 출세가도를 달린건 조일신의 난을 진압할때 한몫하고 나서부터였고, 군사를 지휘하게 된 것은 1354년 원나라에 지원군으로 갔을 적부터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단,
1345년 왜구 3천 격파
1348년 왜구 7천명 격파
1350년 왜구 1만 격파
1351년 왜구 1만 격파
이 이야기들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을 순식간에 알 수 있으니 바로 제외.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이제 이렇게 남아 있네요.
그러면 다음을 봅시다. 저 글을 보면 최영이 공민왕의 눈에 띄기도 전부터 왜구 수만명을 떄려잡았다는, 저런 사람을 못 알아본 공민왕 장님설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홍건적을 수천에서 수만명씩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실제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원나라의 승상 톡토[脫脫] 등을 따라서 고우(高郵)를 정벌하였다. 모두 스물여덟 번 전투를 벌여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톡토[脫脫]가 참소를 당하여 전투가 중단되어버렸다. 다음해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또한 사주(泗州)·화주(和州) 등지에서 적들이 8천여 척을 타고와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자 밤낮으로 힘써 싸워 격퇴시켰다. 적들이 다시 침범해 왔으나, 최영은 몇 번이나 창에 맞으면서도 분전해 적을 거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최영이 탈탈을 따라서 고우성에서 장사성과 싸웠고, 탈탈의 해임으로 전투가 중단되어버린 내용, 이후 귀국할때까지 싸운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화주 등지에서 8천척이 넘는 어마어마한 홍건적이 성을 포위하자 최영은 수차례 창에 맞으면서도 아득바득 싸워서 결국 성을 지켰다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창에 찔릴 정도로 분전하면서도 악전고투한 최영의 활약상은 대단하지만, 이 당시에는 탈탈의 해임 이후 상황히 극도로 악화되어 원나라가 홍건적을 막아내는 것만도 안간힘을 벌어야 했을 정도였으며, 1355년 차칸 테무르가 30만이 넘는 군대를 황하 이북으로 가는 입구엔 중모에서 격파하여 겨우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켰던 상황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최영이 무슨 홍건적 7만을 격파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허무맹랑 합니다.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이것도 생략. 그러면 남은건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렇게 죽죽죽 '최영이 수만명을 죽였다' 고 계속 써놓은 이 글에서 '실제 최영의 전과' 가 빠져 있습니다.
귀국한 후 인당(印璫)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팔참(八站)을 격파하였다. - 고려사 최영전
1356년 최영은 인당과 함께, 압록강 서쪽에 있는 팔참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고려를 지배한 원나라에 대한 저항 의지를 공민왕이 '무력' 으로 보여준 사례였는데, 어이없게도 저 글에는 이 전공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하간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은 1358년 최영이 여진족 2만을 물리쳤다는 내용인데 이 이야기도 황당무계 합니다.
6년(1357), 서해(西海)·평양(平壤)·니성(泥城)·강계(江界)의 체복사(體覆使)로 나갔다. 이듬해 왜적의 병선 4백여 척이 오차포(吾叉浦)를 침구하자, 최영이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 고려사 최영전
'체복사' 란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던 당시, 고려 조정에서 지방에 파견한 일종의 임시 감찰사 겸 사령관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에 피해를 입은 지역의 민정을 다독이고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말로 급한 경우 지휘관도 되지만 일단 가장 핵심적인 일은 '감찰' 로, 하도 똥별들이 극심했던 당시 고려의 상황에서 지방의 장수들이 제대로 싸우는지 확인하는 엄무를 담당했습니다.
체복사를 했던 사람은 여러명이 있지만, 유명한 사람을 최영외에 달리 더 말한다고 하면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 이 이었습니다. 당시 조준이 체복사로서 감찰했던 곳은 경상도 지역이었는데, 조준 한 사람의 파견으로 경상도가 안정되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물론 수천이상의 대규로 올때도 빈번했지만)수십에서 수백단위로 치고 빠지던 왜구를 상대할때에나 통할 전법이지, 여진족 2만 군대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사람 하나 덜렁 보내놓고 막으라고 한다면 공민왕은 여몽전쟁 당시 최씨 정권 이상의 쓰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타부타 말할것도 없이 당시 최영은 당시에 왜구 막느라고 바빴습니다.
또 다시 어이없게도 실제 최영의 전과는 빠져있는데, 1358년 최영은 황해도 오차포에 온 400여척의 왜구 함선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왜구가 사용하던 함선은 최대 탑승숫자가 30명~40명 가량이 되는 배들이었는데, 20명 가량만 타 있었다고 해도 8000명이 되며, 10명씩만 타 있었다고 해도 4000명이 됩니다.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왜구의 최대 침략인 진포-황산대첩 때가 500척이었으니.,..
오차포는 바로 여기.
당시 최영은 복병 작전을 통해 왜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습니다. 4000~8000명에 달할 정도의 왜구를 물리칠 정도라면, 정말로 대승리인데 기록상으로는 상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생각하면 조선왕조에서 최영의 전과를 일부러 축소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지정학적인 연구 관점에서 '대규모 전투가 펼쳐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당연히 엄청난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을것' 이라는 평도 있는 홍산 전투가 엄청난 승리로 기록상 묘사되기도 하는것을 보면 굳이 최영의 전과를 축소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듯 싶고, 아마도 '격파했다' 고 해도 적을 괴멸시킨 승리 이런것보다는 물러나게 했다던가, 혹은 400여척이라는 함선에 비해 적의 실제 전력은 그보다 덜했다거나 했을듯 싶습니다.
당시 왜구는 실제 전력 이상의 함선을 가지고 다니며 허장성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기 떄문입니다. 심지어 나포한 고려군의 함선 수십척을 앞에 세우고 현혹시킨뒤 공격하는 술책을 쓰기도 했으니...
어쨌거나 크게 본다면 엄청난 대승리로 묘사할 수도 있는 이 오차포 전투도, 저 지도글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니 대체 왜...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이 1359년 홍건적 5만을 고려 북방에서 무찔렀다는 이야기 입니다. 일단 당시 최영이 홍건적과 싸운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서북면 병마사(兵馬使)로 있으면서 홍건적이 서경(西京)으로 침입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역(生陽驛)·철화현(鐵和縣)·서경(西京)·함종현(咸從縣) 일대에서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 고려사 최영전
다만 최영전의 기록을 보면 이 전투들은 1359년의 일이지만, 다른 사료를 보면 최영전에 묘사된 '생양역 전투' '철현 전투' '서경 전투' '함종 전투(이 전추는 1차 전투, 2차 전투가 있습니다)' 등은 1360년 1월 ~ 2월에 펼쳐진 전투입니다. 아마도 이 떄의 홍건적이 1359년 12월 경에 침입해와서 2월까지 고려군과 싸웠기 때문에, 최영이 처음 출진했을 1359년 겨울로 퉁쳐서 기록한듯...
○계묘. 형부상서(刑部尙書) 김진(金縉)과 환관[宦者] 김현(金玄)이 기병 수백 기(騎)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으로부터 사잇길을 따라 가서 서경(西京)에서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 300여 인을 만나서 죽기로 싸워서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 고려사절요 1360년 1월
○갑진.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이 철화(鐵化)에서 적을 만나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병오. 여러 군사가 생양역(生陽驛)에 이르렀는데 총 20,000명이었다. 이때 날씨가 추워서 병사들이 손과 발이 얼어서 트고 쓰러진 자들이 매우 많았다.적이 아군이 장차 진군하여 공격할 것을 알고 마침내 포로로 잡고 있던 의주(義州와 정주(靜州) 및 서경(西京) 사람들을 온갖 방법으로 죽이니, 시신이 쌓여서 언덕과 같았다. 정미. 아군이 진군하여 서경을 공격하였는데, 보병이 먼저 들어가다가 밟혀서 죽은 자가 1,000여 명이었으며, 적의 군사 가운데 죽은 자 또한 무려 수천 명이었으므로 적이 물러나서 용강(龍岡)과 함종(咸從)에 주둔하였다. - 고려사절요 1360년 1월
○2월 기미. 안우(安祐) 등이 함종(咸從)으로 진군하였으나, 적이 우리가 아직 진을 정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돌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적이 정예 기병으로 그를 뒤따랐으나, 안우, 이방실(李芳實), 김어진(金於珍), 대장군(大將軍) 이순(李珣) 등이 군대의 뒤쪽에서 그들을 막으니 적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마침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 정신계(丁臣桂)가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이르러서 적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수십 명의 목을 베니, 적이 추격하다가 50리에 이르러 멈추었다. 우리 보병은 산에 올라서 〈죽음을〉 면하였으나, 그 죽임을 당하고 노략질을 당한 자도 1,000여 인이었다. - 고려사절요 1360년 2월
○임신. 우리 군대가 또 함종(咸從)에서 싸웠는데,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將軍) 이견(李堅)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여러 군대가 힘써 싸워서 20,000명의 목을 베고 가짜 원수[僞元帥]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으니, 적이 물러나서 증산현(甑山縣)을 지켰다 - 고려사절요 1360년 2월
이 전쟁에서 고려군이 이긴 전투도 있고 진 전투도 있습니다. 이기고도 큰 피해를 입은 전투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함종에서의 2차전에서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고 적 2만명을 참살하면서 결국 적을 몰아낼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록등에서 최영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열전에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싸워 큰 공을 세웠다' 라고 써진걸 보면 당시 최영의 위치가 최고 지휘관급은 아니었기 때문에(당시 최고 지휘관은 안우, 이방실, 이암, 이승경 등등) 크게 보는 기록에서 제대로 언급은 안되지만 그 안에서는 용맹하게 싸웠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함종에서 고려군이 죽인 홍건적 숫자는 2만명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규모입니다. 그러나 저 글에 나온 '홍건적 5만' 에는 못미칩니다.
○정묘. 홍두적(紅頭賊) 괴수 가짜 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무리가 40,000이라고 떠들면서 얼음을 밟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의주민 1,000여 인을 죽였으며, 정주(靜州)를 함락시키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였으며, 마침내 인주(麟州)를 함락시켰다. - 고려사절요 1359년 12월
당시 홍건적을 이끌던 대장은 모거경이라는 인물입니다. 기록에서는 '모거경의 무리가 4만이라고 떠들었다' 고 나오는데, 즉 호왈 4만이라는 것으로 실제 규모는 4만도 안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2만명을 참살한 것만 해도 충분히 대승리인데 이걸 굳이 부풀릴 필요가 있을지... 이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것은 이렇게 됩니다.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이 다음에는 여진족을 겨우(?) 4천명을 물리친 전투 외에는 1360년부터 1361년까지 원나라를 물리쳤다는 말이 쭈욱 나옵니다. 그럼 이 당시 최영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최영전에서 보겠습니다.
평양윤(平攘尹) 겸 서북면 순문사(西北面巡問使)가 되었는데 당시 전쟁의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진제장(賑濟場)을 여러 곳에 설치하여 양식과 종자를 지급해 농사를 장려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매장해 주었다. - 고려사 최영전
1359년 12월 ~ 1360년 2월까지의 전투가 끝난 후 최영은 서북면 순문사로서 전쟁의 피해를 입은 병사를 위문하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방의 농사를 독려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원나라 군사 6천, 1만 5천, 1만, 2만, 4만과 싸울 시간은 없었습니다.
이 당시 최영이 싸운다고 하면 상대는 원나라가 아니라 역시 홍건적이었을 겁니다. 홍건적은 1360년 2월에 물러난 이후 그 해에도 두어차례 다시 들어오곤 했으며, 1361년 중반 부터는 한층 더 강력한 대규모 군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1361년 말에 이르면 홍건적에 개경을 함락하고 공민왕이 피난을 가는 상황이었는데 무슨 정신으로 원나라 군사 4만과 싸울 정신이 있을지...
그것들을 싹 지우면 이제 이렇게 남습니다.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1362년 최영이 홍건적 20만을 물리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해당 기록을 보면,
○갑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감독하여 진군하게 하여 여러 장수들이 나아가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서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최영은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공신각에 초상이 안치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부모와 처도 작위를 받았다. - 고려사 최영전
최영은 당시 총병관 정세운 지휘 아래 펼쳐지는 전투에서 장군 중 한 명으로 출진해서 개경을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제대로 맞는게 하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로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을 물리쳤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는 고려사 공민왕 세가 12년(1363년)이나 고려사절요 1363년 기록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해 공민왕은 2월에나 되서야 도성에 겨우 돌아왔고, 그 직후 흥왕사의 난이 있었으며, 당연히 그 이후에는 전후 처리및 난 처리로 바빴고, 왜구가 계속해서 몰려왔으며, 무엇보다 덕흥군이 고려의 왕위를 주장하며 불온한 분위기가 국경에서 감돌았습니다. 이 와중에 무슨 5만 병사랑 전투할 정신머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명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사실입니다. 드디어 맞는게 2개 나왔습니다. 이는 덕흥군의 침입인데, 1만명을 이끌고 온 덕흥군은 최종적으로는 20명도 남기지 못한채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여 도주하게 됩니다. 여러 장수들이 참여한 전투였지만 최영은 수주 달천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중군을 이끈 군의 중심이었습니다.(당시 우익이 이성계)
1374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한 것은 맞습니다. 이 당시 목호들이 3천 기병을 동원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던 것 역시 맞습니다. 하지만 적의 숫자가 3만이나 되었다는 것은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남은게 이렇게 됩니다.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이 뒤로는 왜구를 물리친 이야기가 줄줄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영은 1375년, 우왕이 즉위한 이후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사실상 장수로서 일선에서는 '은퇴' 했습니다. 대신 직접 싸우기 보다는 일종의 총지휘관으로서 군무를 비롯한 여러 일을 우왕에 앞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의논하는 위치에 있었고, 실제 나이도 환갑에 이르렀기 때문에 왠만한 일이 아니고선 직접 나설 일이 없었습니다. 특히 멀리 출정해야 하는 원정은 더욱 그렇구요. 그 황산대첩 때 조차도 명성 높은 최영 대신 이성계가 나선 이유가 있습니다.
때문에 1375년 왜구와 싸웠다는 이야기는 볼 것도 없이 '그런 사실 없음' 입니다. 1376년, 왜구가 극성이자 최영이 우왕에게 '자원' 하여 우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나서 승리를 거둔 '홍산전투' 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산전투는 최영 본인이 스스로 '적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고 말하며, 무엇보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상, 대규모 부대가 밀집하기엔 어려운 곳이라 실제로도 큰 규모의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아니라 홍산전투의 규모를 최대로 본다고 해도 2만이나 될리는 없습니다.
1378년, 해풍 전투는 수도 개경의 15km 안쪽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개경을 향해 진격해오던 특별 상황이라, 최영이 총대장으로서 군세를 이끌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전투는 지원군으로 나중에 도착한 이성계의 활약으로 승리했는데, 적의 숫자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1380년에는 황산대첩이 있던 해였는데, 이 해에 최영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동서강을 방비하러 나오는것을 빼고는 일선 현장에 나선 적이 없습니다. 애시당초 병이 걸려 몸이 안 좋아서 멀리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저것 다 지우면 남는 것은 이렇게 됩니다.
1345년 왜구 3천 격파
1348년 왜구 7천명 격파
1350년 왜구 1만 격파
1351년 왜구 1만 격파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이렇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로 채워넣기도 힘든데...
누군가 그냥 말도 안되는 걸 상상으로 채워서 올려놓으면 그냥 바로바로 퍼져서 너도나도 부화뇌동 하기 십상...
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써재끼는지 하도 궁금해서 좀 찾아보고 다녀 봤습니다.
???
아니 이게 뭐야
지도 자체는 좀 다르지만 보니까 내용의 원전은 이거인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데 조무는 최영이 아니라 이성계가 격파한 원나라 군벌이고, 아합출로 말하자면 '이성계 부하' 였는데?
내용을 보는데 점입가경입니다.
그럴듯하게 '고려사' 라고 원문 내용처럼 쓰면서 전라도병마사 휘하였던 '최영이 친병 100여기를 거느리고 앞장 서 왜구를 물리쳤으니' 등등 이야기 하고 있는데, 맨 위에 국역 고려사 첫부분을 올린걸 다시 보시면 알겠지만 '양광도 도문무사' 의 휘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냥 소설이 난무하네요. 고우성 전투는 원나라 군관들이 계속 전투를 중지시켜서 고려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일전에 그 전투 이후에 탈탈은 유배를 떠나 죽게 되면서 군사 지휘를 하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유배 가서 죽은 탈탈이 최영을 보고 "사람이 아니다, 귀신이다!" 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아마 귀신은 최영 보다는 탈탈이었나 봅니다.
'신원사' 의 내용은 또 뭡니까? 신원사의 '고려전' 부분에서는 기황후 관련 이야기만 있을 뿐이지 애당초 고려의 파견 이야기 자체를 다루지를 않았습니다. 최영의 신묘한 무력 따위를 그렇게 일일히 그렇게 써줬을리도 만무하구요.
압권은 최영이 '1355년 홍건적 명장 남옥을 쳐부셨다' 는 부분입니다. 남옥은 주원장의 부하였던 상우춘 아내의 동생으로, 상우춘의 추천으로 주원장의 장수가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상우춘이 주원장의 부하가 된 게 1355년 4월이었고, 이때는 그냥 '졸병' 이었습니다. 그 후 강남으로 진출하는 와중에서 공을 세워 출세했는데, 이 무렵에는 본인도 막 주원장의 눈도장을 찍으며 출세하기 바쁜 상황이었는데 어느 세월에 남옥을 추천하며, 그 추천한 남옥이 2만명이나 단독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것인지... 원순제에게 금장을 하사받고 돌아갔다는 부분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이후에는 그냥 막나갑니다. 최영이 '홍건적 선봉대장 한림아와 일기토를 벌여서 죽였다' 고 합니다.
한림아는 홍건적 선봉대장이 아니라, 홍건군 총본산인 동계홍건군 용봉정권의 군주로, 중국에 있는 수백만 홍건군 가운데 명분상으로는 가장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일기토 따위를 한 적도 없고, 죽은 시기도 1359년이 아니며, 죽은 장소도 고려의 서경이 아닙니다.
한림아 : 야! 나 왜 죽여?!
그 이후에는 '살리타이' 가 고려민을 납치해 가자, 최영이 무찔렀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살리타이는 고려 시대 전쟁사에 조금만 관심 있으면 다들 아시겠지만, '여몽전쟁 당시 몽골군 대장' 이었습니다.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죽었으니, 1360년에 살리타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100년의 세월을 거쳐 진화한 다음 다시 부활했나 봅니다.
독로강(독로성이 아니라) 만호 박의를 무찌른 전공이나, 원나라 군벌 조무(당연한 소리로 러시아까지 추격한 적 없음)를 물리친 전공은, 이성계의 전공입니다. 나하추를 무찌른 전공도 마찬가지구요. 아합출로 따지면, 아예 그냥 이성계 부하였습니다. 후배 전공도 자기걸로 뻇어먹는 나쁜 최영 장군...
1378년 해풍 전투는.... 아니, 그런데 이제 보니까 이 양반 제 글도 베꼈네요.
글에 있는 짤은 내가 그림판으로 조악하게 한땀씩 쓴걸 그대로 가져다 쓰고, '왜구는 수도인 개경에 타격을 가하려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실현되었다면 홍건적에 이어 또 한번 고려 말기에 왕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사태이자, 해적때에 수도가 털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판이었는데, 더 심각한것은 그게 실현 직전까지 갔다' 는 문맥도 그냥 그대로 붙여넣기 했네요. 뭐 이런 상황이...
여하간 이 해풍 전투는, 저도 전에 한번 글로 다룬 적이 있지만, 최영이 패퇴하던 상황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구원병이 극적으로 도착해 이긴 전투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최영이 구원병으로 와서 이긴것처럼 서술했네요.
저 정도로 뻔뻔하면 역으로 멘탈 본받고 싶네...
1354년 중국 장쑤성 고우 전투 (스물 여덞번의 교전을 치뤄 성 함락을 눈앞에 뒀으나 원나라 사정으로 전투 중단)
1355년 회안로 방면 수비 (8,000명 척 가량의 적군을 상대로 수비)
1356년 압록강 서쪽 팔참을 원정
1358년 현 황해도 장연군에 병선 400여척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파
1359년 황해북도 - 평안남도 - 서경에 이르는 군사범위에서 홍건적 격파
1362년 개경 수복전 참가, 승리
1363년 흥왕사의 난 진압
1364년 덕흥군의 침입 격퇴 (적 1만 명 중 17명 빼고 전멸)
1374년 목호의 난 진압
1376년 홍산 전투 승리
1378년 해풍 전투 승리
1388년 개경 공성전에서 요동 원정군과 전투, 패배
실제 최영의 전과는 이 정도 입니다.
실제로 한것만 따져도 대단한데 굳이 말도 안되는 소설까지 써야 하는지...
처음에는 "어이없는 짤이 돌아다니는데, 실제 내용은 다릅니다. 혹여 막 퍼지면 진상에 대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미리 사실 확인 정도 해보렵니다." 정도로 쓰려는 글이었는데,
쓰다가 갑자기 원출처로 보이는 글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