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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5/28 13:19:08
Name 손금불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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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스포츠] [해축] 악몽으로 바뀌어버린 첼시의 셰브첸코 드림


원 출처: https://theathletic.com/1741974/2020/04/15/sheva-shevchenko-andriy-chelsea-roman-abramovich/
번역 출처: https://www.fmkorea.com/2871268247 에펨코리아 KUEE



셰브첸코, 첼시 그리고 악몽으로 바뀌어버린 꿈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존 오비 미켈은 그 당시의 일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그는 당시 최고의 스트라이커들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안드리 셰브첸코와 첼시에서 함께 했던 시절이 어땠는지에 대해 막 질문받은 참이었다.

"안드리는 엄청나게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마디도 안 했죠." 미켈은 The Athletic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마 제가 함께 했던 선수들 중 가장 말이 없던 선수였을 겁니다. AC 밀란에서의 그의 이력은 믿을 수 없는 수준이였죠. 저는 그의 경기를 보며 자라났고, 그가 팀에 합류했을 때 전 '와, 셰바라니!'라고 감탄했죠. 우리는 그냥.. 왜 그가 팀에 합류한 후 말을 하려들지 않았는 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경기장에서도, 훈련장에서도 일과 후 시간에도 말입니다. 이상했어요."

많은 단어들이 셰브첸코의 첼시 커리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 중 칭찬을 담은 것은 거의 없다. 첼시 역사상 최악의 영입생들을 담은 리스트가 쓰여진 어떤 웹사이트에 접속하든, 그의 이름은 맨 윗부분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2006년 첼시가 £30.8m에 영국 축구 사상 최고 이적료를 갱신하며 셰브첸코를 영입했을 때, 이는 이미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2년 연속 우승한 팀이 자신들의 진정한 야망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셰브첸코의 영입은, 계속하여 영국 축구계를 지배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얻어내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따내고자 했던 첼시에게 있어 마지막 퍼즐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셰브첸코의 합류는 구단에 많은 부정적인 시선을 불러왔고, 또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주제 무리뉴의 관계가 처음으로 악화되는 데 있어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기사는 영국 축구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적들 중 하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때때로 그러했듯, 무리뉴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팀 첼시는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향해 순항중이었다. 첼시는 2005-06 시즌 3라운드부터 리그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무리뉴가 원했던 경기력이 뜻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1,2차전 모두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첼시에게 챔피언스 리그 16강 탈락의 고배를 남겼다. 리그 컵과 FA 컵에서의 여정 또한 각각 찰튼(3라운드)과 리버풀(준결승)에 의해 끝이 났다.

무리뉴는 이미 2006-07 시즌에, 팀 스타일에 미세한 변화를 줄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도했던 두 시즌 동안 겨우 몇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던 전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무리뉴는 성장세를 보이던 디디에 드로그바와 함께 뛸 또 다른 공격수 한 명을 찾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이 문제는 당시 구단에서 기용 가능했던 선수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르난 크레스포는 여전히 팀의 주포였지만, - 그는 그 해 13득점을 기록했다 - 그는 팀에서 겉돌고 있었고 세리에로 돌아가길 원했다. 에이두르 구드욘센은 2000년 이후 팀의 1등 공신이었으나 그와 무리뉴 간의 관계는 좋지 못했고, 시즌이 끝난 후 바르셀로나로 팔렸다. 아카데미 출신 선수 칼튼 콜 또한 팀의 잉여 자원으로 분류되어 웨스트햄으로 떠나갔다.

따라서 무리뉴는 잠재적 영입 후보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했다. 당시 구단측 내부 소스는, The Athletic에게 "다섯 명의 후보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선수들이 있었어요. 그 중 하나는 바르셀로나의 사무엘 에투였습니다. 목록에 있던 선수들 중 가장 마지막 선수는 셰브첸코였고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를 넣은 것일까요? 예,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무리뉴는 아브라모비치가 팀에 데려오고 싶어했던 모든 선수들 중, 셰브첸코를 가장 원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006년 5월 31일, 셰브첸코가 주급 11만 5천 파운드를 받는 4년 반 계약에 서명했다는 오피셜이 나왔다. 공개적으로, 무리뉴는 자신의 황홀한 기분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오늘은 꿈이 현실이 된 날입니다. 제가 첼시에 왔을 때부터, 안드리는 언제나 저의 최우선 영입 대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훌륭한 능력, 야망, 프로 의식 그리고 전술적 이해도가 있어요. 또한 두 말 할 것 없이, 안드리는 훌륭한 골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 줄 해결책을 찾기는커녕, 무리뉴에게는 이제 막 골칫거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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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모든 슈퍼스타들 중에서, 아브라모비치에게는 자신이 2003년 첼시를 인수했을 때부터 반드시 데려오고자 했던 한 선수가 있었다. 2003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이 얻어낸 결정적인 PK를 성공시키며 유벤투스를 제압한 셰브첸코는 전 유럽의 화두에 올랐다. 그 해 여름 아브라모비치는 인테르와의 회담을 위해 밀란으로 향했다. 그는 인테르의 몇몇 선수들에 대한 영입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했다. 이 회담은 고풍스러운 포 시즌스 호텔에서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셰브첸코 또한 이 곳에서 자신의 측근을 만나기로 했다.

셰브첸코의 존재를 알아차린 아브라모비치는 찾아온 기회에 주저함이 없었다. "저는 거기 약속이 있어서 갔는데, 다른 누군가가 저를 로만에게 소개했습니다." 셰브첸코는 The Guardian 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곧바로 그는 제게 첼시로 오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혀 아니라고 답했어요. AC 밀란에서 행복했으니까요. 우리 팀은 막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상태였습니다. 그 후 5분 정도 더 이야기했고, 그게 끝이었습니다."

만약 셰브첸코가 그것으로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첼시의 부유한 신임 후견인을 몹시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듬해 5월, 아브라모비치와 CEO 피터 캐년은 AC 밀란의 부회장 아드리아노 갈리아니와 회담을 가졌다. 양측 모두 그 회담의 무게에 대해 손사래를 쳤지만, 그런 강한 부인만큼이나 회담의 주제가 무엇이었을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러나, 2004년 32경기에서 24골을 몰아치며 팀을 세리에의 정상으로 올리며,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셰브첸코는 다시 한 번 팀에 잔류했다.

2005년 밀란이 다시 한 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준비하고 있던 당시, 이미 아브라모비치와 셰브첸코가 친밀한 관계이며, 주기적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분명히 셰브첸코는 아브라모비치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축구계의 고위층 및 고위 관계자들은, 아브라모비치의 부가 축구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햇다.

승부차기에서 최후의 실축을 범하며 악몽으로 남은 리버풀과의 경기가 열리기 전, 셰브첸코는 "저는 로만의 모든 부분 - 그의 진지함과 근면함, 첼시에서 그가 만들어내려 하는 것들과 그 방식 - 에 대해 진정한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그에게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고 있어요. 비록 제가 우리 둘을 좋은 친구 사이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로만과 그의 부, 그리고 그 부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말들이 정말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로만은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려고 매 여름 이적시장마다 팀을 통째로 갈아버리는, 그런 멍청이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몇 개월 후, 2005년 보스턴에서 열린 첼시의 AC 밀란과의 프리 시즌 친선경기 경기장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AC 밀란이 셰브첸코를 지키려고 노력했음에도, 그의 이적은 단지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적을 이끌어내기 위한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셰브첸코는 2009년까지의 계약이 남아있었으며, 1999년 디나모 키예프를 떠나 합류한 자신이 사랑하는 팀을 떠나도록 하는 데는 많은 설득이 필요했다.

이 때 그의 부인 크리스틴 파직이 도움이 되었다. 파직은 당시 아브라모비치의 부인이었던 이리나와 친구 사이였으며, 크리스마스 직전에 런던으로 함께 쇼핑을 가기도 했다. 아마도 이 때, 셰브첸코와 파직은 가족을 위해 새로운 한 단계를 밟는 것을 꽤나 진지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들의 맏아들 조던은 여전히 유아였고, 둘째 크리스찬은 아직 뱃속에 있었다. 부부는 아이들이 영어를 쓰면서 성장하길 바랐고, 런던에서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고향 - 우크라이나와 미국에 쉽게 갈 수 있다는 지리적 요점도 있었다. 한 소식통은 이에 대해 "그 결정은 축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사교적, 개인적인 것이었다." 라고 주장했다.

첼시는 밀란이 셰브첸코에게 지급했던 주급을 맞춰줄 준비가 되어있었고, 자신의 마음을 돌리려던 갈리아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셰브첸코는 런던 서부로 떠나고 싶다는 자신의 의향을 분명히 했다. 이제 골치 아픈 이적료 협상만이 남아있었다. AC 밀란은 첼시에게서 (당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비싼 이적료를 받아냈다. 비록 셰브첸코가 30살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약간은 위안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이적은 여전히 아픈 상처였다.

당시 갈리아니는 "영어가 이탈리아어에게 거둔 승리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는 그에게 잔류하라고 설득했습니다. 단언컨대, 제가 밀란에 부임한 이래 가장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입니다." 라고 말했다. AC 밀란의 회장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 소식을 그보다 훨씬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셰브첸코가 떠나고 7개월 후, 베를루스코니는 그와 그의 아내를 겨냥해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진정한 밀라니스타와 진정한 남자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 가정에서는 제가 책임을 지고 결정권을 가집니다. 셰브첸코요? 그는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 작은 애완견마냥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갑니다. 그의 아내가 그로 하여금 아이들과 런던으로 향하게 했고, 이제 런던의 안개로 그들의 폐가 한결 좋아지겠네요. 그렇게 다 끝났죠 뭐."

그렇다면, 2004년 클라우디오 라니에르를 대신해 첼시의 사령탑에 앉은 무리뉴는, 이 매우 값비싼 신입생을 노리고, 결국 데려오는 데 있어 대체 얼마나 관여한 것일까? 케년은 2007년 1월 BBC 라디오 5 라이브에 출연해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 그건, 어.. 무리뉴가 부임하기도 전에 논의된 부분입니다. 어.. 예전에 우리가 스쿼드를 살펴보고 있을 때 말이죠.. 그리고 이적 회담은 지난 시즌까지 매년 계속 나온겁니다.. 우리가 그를 데려오려고 애쓰고 있었을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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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입이 무리뉴나 아브라모비치의 아이디어였는가에 대한 집요한 질문에, 캐년은 덧붙여 말했다. "그 아이디어는, 어.. 아시다시피, 우리는 스트라이커가 필요했어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에 누가 있었죠? 만약 제가 여러분한테 이 질문을 했으면, 여러분도 셰브첸코라는 이름을 말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2년도 되지 않아 셰브첸코를 영입 희망 목록에 적어둔 구단은 거의 없게 되었다.

아브라모비치나 무리뉴는 몰랐겠지만, 셰브첸코의 첼시 커리어는 그가 첼시와의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실패할 운명이었다. 계약에 합의하기 3주 전에, 셰브첸코는 파르마와의 리그 경기에서 고통스러운 무릎 부상을 당했다. 그가 여름을 온전히 부상에서 회복하는 데 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셰브첸코는 조국의 첫 월드컵에서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셰브첸코는 2골을 넣었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4-0으로 이긴 경기에서 팀의 세 번째 골을, 튀니지전에서 PK 골을 넣었다) 우크라이나가 8강까지 진출하는 인상 깊었던 여정 속에서도, 정작 자신은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듯 날카로운 모습의 결여는 첼시에서의 초반부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비록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넣은 데뷔 골은 영리한 오프 더 볼 침투 능력과 깔끔한 마무리 능력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긴 했지만 말이다.

셰브첸코는 미들즈브러에게 2-1로 패배한 경기에서도 다시 한 번 득점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득점 이후 2달 동안이나 무득점에 그쳤다. 이는 AC 밀란에서 296경기에 출전해 173득점이나 기록한 선수와는 영 딴판의 모습이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셰브첸코가 엄청난 환대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고, 지금까지도 거주중인 런던의 저택을 얻어주었다. 아브라모비치는 또한 메이페어의 Cocoon Restaurant에서 열린 셰브첸코의 30번째 생일 파티에도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당시 이 파티에는 그의 팀원 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 마이클 발락 등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 날 밤은 셰브첸코가 선수들과 어울리는, 매우 드물었던 날들 중 하나로 남았다. 미켈은 "우리 선수들은 첼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뛰었고, 경기에서 승리했고 우승컵을 차지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또한 사교적으로도 아주 잘 지냈습니다. 언론이 언제나 우리가 노는 모습을 볼 순 없었죠... 하지만 셰바는 우리의 친목 모임에 썩 자주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수들과 별로 놀러나가지 않았어요. 가족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영어를 할 줄 몰라서 우리랑 못 어울리는 건지 긴가민가했지만, 그냥 한 마디도 안 하는 사람이더군요."

선수 연락 담당자 (Player liaison officer) 였던 개리 스태커는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기에 셰브첸코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또 다른 친구로는 후보 골키퍼 카를로 쿠디치니가 있었다. 이후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두 사람 모두 러시아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많은 경기에 출전하던 셰브첸코는 세 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했는데, 이 세 경기 모두에서 그는 드록바와 투톱으로 출전했다. 이는 그를 다소 고무시켰다. 두 선수 간에 파트너십이 형성되는 듯 했으며, 그 백미는 드록바가 해트트릭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셰브첸코의 골을 어시스트했던, 왓포드에게 4-0으로 승리한 홈 경기였다.

그러나 2007년 1월, 두 선수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록바는 자신의 상황에 행복하지 않았다. "저는 셰브첸코에게서 어떠한 협동의 의사도 볼 수 없습니다. 저는 그가 어떻게든 골을 넣어 스스로의 이적료를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득점을 나눠 갖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도움을 주면 제게도 무언가 돌아오길 바랍니다. 만약 다함께 정말 열심히 뛴다면, 모두가 조금씩 얻어가는 게 생깁니다. 저는 그의 위치를 이해하고 설명을 듣고자 노력했어요. 저는 경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를 위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이 그에게 있어 정말 힘든 상황이라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팀이 먼저입니다."

미켈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드록바가 문제의 일부였다. "디디에는 항상 시험대를 마주치는 걸 좋아했어요. 더 큰 경기일수록, 주전 경쟁이 빡빡해질수록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했죠. 셰바가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경기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자신이 팀의 주전임을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훈련장에서, 디디에는 셰바를 도와주려고 했어요. 훈련이 끝나면 그들은 함께 슈팅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램파드도 함께 했어요.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하자며 다른 선수들을 고무시켰습니다."

셰브첸코는 한 차례의 엄청난 왼발 슈팅으로 화이트 하트 레인의 홈 팬들을 침묵시켰고 자신의 훌륭한 능력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2007년 3월 열렸던 FA 컵 8강 재경기에 동행했던 첼시 팬들은, 이 골 하나만으로도 그 비쌌던 이적료를 메울 만 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당시 첼시 선수들 또한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 모두 이게 바로 우리가 그토록 기대했던 셰브첸코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죠," 미켈이 말했다. "놀라운 슈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득점이 무언가의 시작이자, 반등의 시점이라 생각했어요.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고, 셰브첸코가 돌아올 거라고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첼시에서의 시간은, AC 밀란에서의 커리어와는 달랐다.

"골을 못 넣는다와 같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첼시는 셰바의 폭발적인 면모를 회복시키려 애썼어요. 모두가 그를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그가 적당한 시기에 온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곧 30살이 되는 선수였고, 우리 모두가 알듯이 그 나이부터는 조금씩 쇠퇴해가죠."

영국 언론은 셰브체코의 실패가 무리뉴와 아브라모비치의 불화로 이어졌다는 기사를 연일 찍어냈다. 무리뉴는 셰브첸코를 주전에서 빼는 데 두려움이 없었으며, 의미심장하게도 기자 회견에서 밝힌 자신의 베스트 11 중 8명의 "언터쳐블한 선수"에서 그의 이름을 빼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형편없는 경기력만이 무리뉴에게 있어, 원인의 전부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한 소식통은, 무리뉴가 언제나 "아브라모비치와 친밀한 관계인 선수들에 대해 불안해했다" 고 주장했다.

미켈의 경우, 그는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네,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때때로 무리뉴와 셰브첸코는 대화를 나누었고 좋은 관계처럼 보였어요. 둘 사이에 좋지 못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어쩌면 사적으로 험한 말이 오갔을 수도 있겠지만요. 두 사람 간에는 어떤 불협화음도 없었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훈련장에서 본 건, 무리뉴가 그를 더 나은 선수로 만들어주고자 한 것, 그리고 셰바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는 것입니다."

"셰바는 정말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연습에 몰두했고 열심히 뛰었죠. AC 밀란에서 왔다는 점에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그의 워크 에씩은 엄청났습니다. 훈련장에 일찍 출근하고 열심히 훈련받았죠. 불평한 적 한 번 없고, 누구에게도 나쁜 소리 한 적 한 번 없는데다가 다른 선수에 대해 뒷담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격이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요. 경기에 결장하면 그 다음 날엔 정말 열심히 훈련받았습니다. 훌륭한 프로 선수였죠. 어린 나이에 그의 대응 방식을 지켜 본 것은 제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20살의 선수로들은 이런 슈퍼스타들 - 엄청난 자아를 갖고 있는 선수들 - 을 보면서 자신의 롤 모델을 정합니다. 이 선수들은 정말로 프로페셔널했고, 팀은 팀이지, 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셰바를 포함해서, 저는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아스날을 상대로 승리한 리그컵 결승전에서 선발로 출전한 셰브첸코는, 새롭게 개장한 웸블리에서 개최된 첫 FA컵 결승전에는 부상으로 결장했다. 이 날 첼시는 드록바의 결승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리버풀에게 패배한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도 결장했으며, 리그에서는 유나이티드가 첼시의 왕좌를 탈환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가온 여름은 무리뉴와 아브라모비치 간의 긴장감이 사그라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무리뉴는 공격진을 강화하고 셰브첸코에게 더 많은 압박을 주기 위해, 자유 계약 선수인 클라우디오 피사로 대신 더 뛰어난 선수의 영입을 원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영국의 전 올림픽 달리기 선수였던 대런 캠벨이 구단에 합류해, 셰브첸코가 그의 날카로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함께 훈련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셰브첸코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분명히 무리뉴는 그런 것들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셰브첸코는 여전히 팀원들과 자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유명한 골프 코스를 등지고 있는 서레이의 Wentworth 지역으로 이사를 간 그에게, 새로운 스포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첼시에서 뛰었던 미드필더 스티브 시드웰은 The Athletic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일 골프 의류를 입었습니다. 제가 훈련을 끝내고 퇴근할 때 쯤이면, 그는 언제나 골프 의류를 입고 Wentworth에 골프를 치러 갈 준비가 되어 있었죠." 라고 밝혔다. "셰바가 완전히 외톨이였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족이나 골프가 우선이었고, 첼시가 그 다음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는 훈련을 받을 때면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제가 그의 그룹에 속했을 때 그는 언제나 저를 신경써주었고 그건 정말 좋은 경험이었죠."

다음 시즌이 시작된 지 한 달 후, 홈에서 로젠보리와 1-1 무승부를 거둔 후 무리뉴는 경질되었다. 우연히도, 셰브첸코는 이 날 첼시의 득점을 성공시켰다. 이후, 그와 캠벨은 더 자주 만나 같이 훈련을 했다. 시드웰은 이를 셰브첸코가 반등을 위해 마음먹은 것이라는 신호로 여겼다.

당시 캠벨은 "무리뉴의 밑에서 셰브첸코는 밀란에서는 허락받았던 것들을 금지당했습니다. 당시 밀란에서 그는 개인 스프린트 코치가 있었고 그와 함께 훈련했죠. 저는 그의 컨디션 조절에 주력하고 효과가 있는 듯 하네요. 우리의 훈련은 첫 30 야드에서 보다 더 효율적인 스프린트를 가져가는 데 초점을 둡니다. 선수 본인도 제게 자신이 더 건강해졌고, 더 날카로워졌다고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첼시에서의 두 번째 시즌 역시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브라모비치의 가까운 친구 아브람 그란트가 감독을 맡았음에도 그랬다. 그 해 12월,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멋진 득점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불꽃이 타올랐지만, 바로 그 경기에서 등 부상을 당하며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부상에서 회복하는 데 수 개월이 걸렸으며, 탈장 수술마저 받아야 했다.

2008년 여름, 그는 이탈리아의 신문사 Corriere della Sera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체 수준이 "최대 40퍼센트"에 불과한다고 말했다. 셰브첸코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생각했고, 첼시를 떠나고 싶어했다. 첼시는 이미 겨울 이적시장에서 £15m의 이적료로 볼튼으로부터 니콜라스 아넬카를 데려오려 하고 있었으며, 아넬카와 드록바의 커넥션은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셰브첸코의 기량 하락이 너무 심했는데다가, 그의 연봉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까지 겹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을 보인 팀은 거의 전무했다. AC 밀란이 그를 데려갔지만, 그저 임대 이적이었고 첼시는 주급 보조까지 해야 했다. 1년 후, 셰브첸코는 아무 댓가없이 디나모 키예프로 떠나도록 구단의 허가를 받았다.

이렇듯 무난한 탈출을 가능케 한 이가 누구인 지 알게 되어도, 딱히 놀랍진 않을 것이다. "아브라모비치가 바로 허락했습니다. 저는 제가 떠나고자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했죠. 그는 저의 부진이 구단, 팀원이나 코치진 등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좋았던 레벨로 제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밀란으로의 컴백에 있음을 이해해주었습니다.

첼시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라 기대했던 선수 셰브첸코는, 77경기에 출전해 22득점에 그치며 그렇게 팀을 떠났다. 2007년의 리그 컵 결승전이 그가 첼시에서 출전했던 유일한 결승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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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셰브첸코와 첼시는 그 어떤 때보다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탬포드 브릿지를 보고 진절머리를 내기는 커녕, 그는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첼시의 홈 경기를 보러 온다. 아브라모비치와의 우정도 계속되고 있다. 경기장에 있는 구단주 석(owner's box)의 초대석에 셰브첸코가 없을 때면, 첼시의 디렉터인 마리나 그라놉스카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제 셰브첸코는 유능한 감독으로서 명성을 쌓아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표팀은 2016년 셰브첸코를 감독으로 선임했고, 그는 팀을 유로 2021에 진출시키며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Wentworth의 집에 정착해 살고 있으며, 지난 12월에는 이제 13살이 된 자신의 둘째 아들 크리스찬이 첼시의 아카데미에 등록했음을 밝혔다. 분명히 지금의 셰브첸코는 옛 고용주들에게 조금도 나쁜 감정이 없으며, 영어를 하는 데 꽤나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사실, 첼시와 셰브첸코와의 강한 연결 덕분에, 한 내부 관계자는 그가 미래에 첼시 감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달 초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경기 분석가인 안드레아 말데라는 셰브첸코가 미래에 세리에나 프리미어 리그 구단의 감독직을 맡을 것이라 주장했다.

셰브첸코는 첼시의 선수로서는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이야기는 아직 해피엔딩이 미처 쓰이지 못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골프 이야기가 나오니까 좀 쎄하긴 하군요. 첼시에 오기 전 셔브첸코의 기량을 생각해보면 셰브첸코가 첼시에서 처참한게 망가진게 축구팬으로서 참 아쉬운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여기서 낙담한 첼시는 다시 한 번 잘생긴 백인 공격수를 또 거금을 들여 영입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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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호
20/05/28 13:35
수정 아이콘
그리고 첼전드 보싱와가 빅이어를 들지요
파쿠만사
20/05/28 13:38
수정 아이콘
그래도 세브첸코는 존테리 살린것만으로 연봉값 다한거 아닙니....
마블DC
20/05/28 14:29
수정 아이콘
토레스도 챔스4강 쐐기골에 유로파리그 결승전 골로도 충분하지 않을지...
Rorschach
20/05/28 14:32
수정 아이콘
우크라이나 감독을 셰브첸코가 맡고있었군요. 개인적으로 처음 이적 때 첼시유니폼이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는데 결과가 좋지못해서 아쉬워했던 기억잉 나네요.
R.Oswalt
20/05/28 14:50
수정 아이콘
솁첸코가 첼시의 감독으로... 상상만 해도 너무 재밌네요.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반니스텔루이
20/05/28 15:12
수정 아이콘
셰바 첫 경기가 리버풀이랑 커뮤니티 실드 경기였는데 진짜 멋지게 골 넣어서 올시즌도 첼시가 해먹겠구나 했는데 크크
웃어른공격
20/05/28 16:04
수정 아이콘
위닝 첨할대...이 허여멀건한 사람은 누군데 이케 쎄...했던 쉐브첸코......그게 언제냐...후..
Normal one
20/05/28 16:17
수정 아이콘
망할거라고 1도 예측 못함
율리우스 카이사르
20/05/28 17:33
수정 아이콘
글쵸. 나이가 있으니 2시즌 정도 지나면 기량하락을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폭망할지는 아무도 예상 못했을것같아요.
20/05/28 17:42
수정 아이콘
당시 무지막지하던 첼시 스쿼드에서 스트라이커가 상대적인 약점이었다보니
쉐브첸코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으로 생각될 정도였는데
쉐바는 망한 대신 타이밍 좋게 뽀록바->드록신으로 각성이 일어났죠.
피쟐러
20/05/28 19:27
수정 아이콘
존 테리 살린걸로 위안을
저자극
20/05/28 20:25
수정 아이콘
쉐바가 첼시 오기전에 무릎부상을 안고 왔는지는 몰랐네요
그냥 영국 와서 구단주랑 친목질하면서 골프치다 망한줄 아랐넹.
20/05/28 23:08
수정 아이콘
역시 첼시의 등푸른심장..
20/05/29 02:53
수정 아이콘
저도 이 시점에 위닝으로 쉐바를 알게된 처지라, 이렇게 좋은 선수를 무리뉴가 왜 안쓰지? 라고 매번 생각하다가 막상 쓴 경기들에서 매번 죽쓰다 보니 할 말 없던 기억이 나네요.
오기 전엔 무결점 스트라이커였는데 분명..
김태연아
20/05/29 09:37
수정 아이콘
재밌게 봤습니다
스카야
20/05/29 21:49
수정 아이콘
솔직히 결과론이죠..
부진할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완만한 하락정도를 생각했지 완전히 박살날 거라고는..
20/05/31 15:22
수정 아이콘
토레스야 하락세 시점에 데려와서 그러러니 하지만
이형은 진짜 왜? 망했지?? 생각만 들었는데...

이글보니
1. 부상
2. 팀원들과 부조화
3. 골프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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