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6/05 18:29:43
Name yangjyess
Subject [일반] 씨버썸
누군가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글을 대형 커뮤니티에 올리는 문제에 관해 언젠가는 찬반토론이 벌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글로 인해서 나와 한때 인연이 있었던 그 당사자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사생활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권리의 침해로 볼 소지가 있지 않은가 싶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글쓰기 소재에 제한을 둔다면, 사람과의 부대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쓰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또한 지나친 간섭이라는 의견이 나옴직도 하다.

근데 이런 걱정은 내 글쓰기에 대한 근자감으로 여겨져 우습다.

무슨 근거로 내 글이 내 글 안의 등장인물에 대한 사생활 침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주목받으리라 예상하는가?

길바닥에 기어다니는 한마리 개미만큼의 관심도 못 받고 묻혀버릴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은가?

더욱이 내 글이 한 커뮤니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저기 복사되어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내심으로 하고 있는것을 보면 정말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그 쓸데없음보다도 그 솔직하지 못함 때문에 더 비난받고 조롱받아야 한다.

나는 정말 내 글의 등장인물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가? 그럼 글을 안 쓰면 그만 아닌가? 아니면 그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다는 그런 류의 욕구일 뿐인가? 그러려면 혼자 종이에 적어서 대나무숲에 던져버리고 오든지.

[그 사람]은 한때 스타크래프트도 좋아했었다. PGR의 회원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걱정이 안되는가?

어쩌면 나는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버린 이전의 만남과 그때 저질렀던 나의 악의적인 말과 행동에 관해 사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안그래도 당시에 사과는 많이 했었지만... 그 이상으로 상당 기간 미안해하고 괴로워했던 내 마음을 그 사람이 알게 되기를 원하는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음흉한 속셈이라니.





어떤 도서 커뮤니티가 있었다.

서평이나 독후감이 주된 컨텐츠가 되어야 하지만 뻘글과 영양가 없는 키배들이 더 많았던 그런 커뮤니티였다.

20xx년 초여름이었나 '세상 사는데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약간은 자계서틱한 글이 올라왔는데

개인적으로 그 글의 골자에 어느정도 공감을 하였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일단 주장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이 부유한 유학생이었다는게 더더욱 공감을 얻기 힘든 이유였을 것이다.

'너는 부자니까'

'돈이 많으니까 돈에 얽매이지 않을수 있는거다' 라는 식의 댓글이 많았다.

나는 똑같은 제목으로 그 유학생과는 전혀 달랐던 내 가난했던 시절의 체험을 적어 올렸다.

'세상 사는데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서 꼭 부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걸 주장하려 했던 것일까?

어쨌든 똑같은 주장을 하는 내 글은 동정표 때문이었는지 훨씬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때 내 글을 좋게 보아 준 사람 중에 [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당시의 내 글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나를 만나서 직접 말해 주어서 알았다.

'뭔가 좋은 말을 해주고는 싶은데 감히 뭐라고 쉽사리 댓글을 달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받은 인상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인간이었으므로 머지않아 나의 정체가 드러나버린 것에 대해 3년이 지난 지금으로써는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온라인상의 대면은 위에 적은 돈 관련 글보다 약간 이전에 있었는데

그 사람은 커뮤니티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양질의 서평을 자주 올리고 있었다.

그중 박범신 작가의 '은교'에 관하여 호의적인 서평을 올렸었는데

평소 소설 은교를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서평에 화풀이를 했다.

글쓴이를 공격하진 않았지만 소설 은교를 마구 까내리는 댓글을 단 것이다.

서로 의견이 달랐으니 자연히 어느정도 논쟁은 있었는데 그때 서로 척을 지지 않은게 신기하다.

나름 건전한 토론이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그 '돈은 중요하지 않다' 글 이후로 그 사람은 온라인상에서 내게 호의적으로 다가왔고

그때만 해도 영문을 몰랐던 나는 '괜찮은 서평가'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다가 어느 비 오는 새벽에 '우울하다. 아무나라도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싶을 정도다' 라는 내용의 글을 [그 사람]이 썼고

원래 그 커뮤니티가 딱 그정도 시간대에 새벽감성 충만한 <반짝 우울증> 배설글들이 자주 올라오는 곳인지라

나는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고 반 장난삼아 '거기 어딘데?' 하고 댓글을 달았다.

답글은 달리지 않았고 다만 몇시간 후 새벽동이 터 올 무렵 쪽지로 '저녁에 한잔 합시다. 제가 사겠습니다'라고 왔다.

'뭐야... 이사람 진짜 우울한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런 쪽지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내 카톡은 뭐뭐뭐 이긴 한데 이따가 마음 바뀌면 그냥 없었던 일로 해도 돼.'

그런데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낮에 자고 일어나 보니 정말로 만나자는 카톡이 와 있었고 그렇게 나는 [그 사람]과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람]의 성별을 밝히지 않았는데 오프라인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남자로 알고 있었다. (나도 남자)

평소에 올리던 글에서도 남성다운 호쾌함이 느껴졌고 주로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철권 같은 게임 떡밥에도 종종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딱 한번 이 사람 여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워 직접 댓글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남자의 자위행위에 대한 떡밥이 흥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은 약간 그 떡밥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걸 몰라? 너 여자 아냐?'하고 물어보았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고 그 사람은 대충 얼버무렸던것 같다.(어쨌든 당시의 나는 속았다)

그 사람은 항상 나를 형이라고 불렀었고 말투도 그 커뮤니티의 성격상 약간은 오버스럽다 할 정도로 '~ 합니다. ~ 했습니다. ~지 않습니까?'이렇게 극존칭이어서 (따지고 보면 이게 그 사람이 남자라는 근거는 아닌데... 존칭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스러운 귀염성의 부재 측면에서일까...) 나는 그가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약속장소로 출발하면서 친구에게 이런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나 지금 인터넷에서 알게된 모르는(?) 남자랑 만나러 가는데 이거 괜찮은거냐 시발>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에 도착해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느냐는 나의 질문에 '말랐고 머리가 길다'라고 대답을 듣고도 '흠. 음악하는 친구인가'라고 생각하며 라커 김경호를 떠올렸을망정 '읭? 설마 여자?'라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을 만큼 온라인에서의 인상은 남성적이었다.


그 사람은 약속시간에서 약 30분 가량 늦었다.


낯선 도심가의 한복판에서 나는 열심히 <음악 할 것 같은 머리 긴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헐레벌떡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저기... 뭐뭐뭐 님 맞으시죠... "


여자는 분명 온라인상에서의 내 닉네임을 불렀지만 나는 어쩐지 다른 누군가를 찾는 것이라 생각하여 무심코 누구를 찾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늦게 '헉... 지금 내 닉네임 말한건가'하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헤헤..."

"아니... 저... 그... "

"왜요?"

"아니 그러니까... 크흠.  여자였어요?" (지금까지 쭉 반말했는데 여기서부터 존댓말이 나옴)

"네 -  "

"저번에 여쭤봤을때 분명 아니라고... "

"<아니다>라는 말은 안했어요 킄"



.
.
.
.
.
.
.


나중에 헤어질 무렵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아까 처음 봤을 때 제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어떤 생각을 했는데요?"

"땡잡았다... "

"으잌 뭐에요 킄킄킄"

"그렇잖아요... "



.
.
.




(계속)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16/06/05 18:32
수정 아이콘
PGR스러운 전개가 나올것인가...
16/06/05 18:46
수정 아이콘
과연~???
16/06/05 19:02
수정 아이콘
.... 절단신공..?
16/06/05 20:15
수정 아이콘
님들 어서어서 추천을 눌러야 다음글이 빨리 올라오지 않겠슴미까!
자유형다람쥐
16/06/05 20:47
수정 아이콘
cyber 썸이군요 크크크 속편 기대합니다!!
윌모어
16/06/05 22:40
수정 아이콘
윽... 절단신공.. 어서 다음 편을 내 놓으세요ㅠㅠ
candymove
16/06/05 22:59
수정 아이콘
현기증 나네요...

결말은 당연히 pgr스럽게 부탁합니다.
Artificial
16/06/06 09:37
수정 아이콘
크흑 재미있습니다!
죽창을 준비해야하는 것인가
pgr식 결말일것같인가!
프로아갤러
16/06/06 15:12
수정 아이콘
좋은 마무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면왕 김수면
16/06/07 12:21
수정 아이콘
지금 어디 좋은 죽창감 없나 보러 담양으로 가고 있던 중인데 말이죠. 요즘 날씨가 습해서 우후죽순으로 대나무들이 쑥쑥 큰다던데...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5597 [일반] 이별 없이 지낼 수는 없을까. [2] 스타슈터3810 16/06/06 3810 7
65596 [일반] 드래곤 라자는 지금 나와도 성공했을까 [68] kien13915 16/06/06 13915 4
65594 [일반] [MLB] ESPN의 전적을 알아보자 5월편 [3] ESBL3645 16/06/06 3645 0
65593 [일반] 시청률 40% 나오게하는방법은.. [78] game-q12378 16/06/06 12378 0
65592 [일반] 2015년 발매 걸그룹 노래 음원 성적 정리 - 앞으로 남은 3가지 관전 포인트 [30] 삭제됨5836 16/06/06 5836 0
65591 [일반] 공중파 음악방송 차트도 조금은 손봐야 하지 않을까요? [33] 순례자5315 16/06/06 5315 0
65590 [일반] 노박 조코비치 그랜드슬램 달성!! [21] 사상의 지평선5358 16/06/06 5358 1
65589 [일반] 이렇게 비참하게 몰락한 그룹이 있을까요? 혼성그룹 룰라 이야기 [45] bigname12914 16/06/06 12914 0
65588 [일반] [질게] 아리송한 썸녀와의 관계 후기입니다. [54] 삭제됨13355 16/06/06 13355 4
65587 [일반] [야구] 2016 프로야구 10주차 감상(부제 : 클로저의 선발전환) [35] 이홍기6075 16/06/06 6075 5
65586 [일반] 거사(擧事)의 두려움 [74] 쇼미더머니8234 16/06/05 8234 5
65585 [일반] 면접이라는 게 항상 보고나면 후회가 남는거 같네요. [14] HuggingStar10265 16/06/05 10265 2
65584 [일반] 야구 참 어렵네요. (삼성라이온즈 이야기) [59] 天飛7071 16/06/05 7071 0
65583 [일반] 우리동네 음악대장 12곡 [30] 성동구12267 16/06/05 12267 21
65582 [일반] 씨버썸 [10] yangjyess5325 16/06/05 5325 14
65581 [일반] 껍데기 [16] 누구겠소4508 16/06/05 4508 11
65580 [일반] <시카리오 : 암살자들의 도시> - 후아레즈스러운 영화(스포가득) [40] aSlLeR6397 16/06/05 6397 17
65579 [일반] 브록 레스너 7월 9일 UFC 200 복귀 확정 [30] 어리버리5692 16/06/05 5692 1
65578 [일반] [미술] (혐오주의) 인간과 죽음에 대하여, 데미안 허스트 [32] Basquiat18420 16/06/05 18420 22
65577 [일반] D-3 수술을 앞두고 드는 잡생각들... [30] 최강한화6250 16/06/05 6250 9
65576 [일반]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 다녀왔습니다. [29] 영혼의공원7179 16/06/05 7179 8
65575 [일반] <아가씨>는 반전 영화도 아니고 페미니즘 영화도 아니다. [50] 마스터충달9384 16/06/05 9384 10
65571 [일반] 베이징 세대가 kbo에 등장할거 같습니다. [48] 그시기10413 16/06/05 10413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