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2/21 16:14:57
Name 현직백수
Subject 억울할 때만 눈물을 흘리는 누나였다.
나는 대체로 억울할 때 눈물을 흘린다.


극소수정예로 남은 나의 대학교 인맥중

2살 많은 누나가 있었다.

친하기도 했지만 성격이 비슷해 오히려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그 누나도 억울할 때 울었다.

서로 억울하면 같이 울면서 화를 내기도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누나였고

뭔지모를 동질감을 느껴 좀 더 친했던 것 같다.



누나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에

미리 응원의 메세지를 남겼다.

3달 간 답장이 오지않았다. 시험이 끝난 후에도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위암말기인 어머니를 간호한지 오래돼서 시험준비를 하나도 하지못해

시험을 잘보라는 나의 문자에 뭐라 답할지 몰라 답장을 못했었다.

라고 담담히 말하는 누나였다.


오랜만에 연세대학교 앞에서 만났다.

아니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만났다.


술을 꽤나 마시던 누나가

싸우지도 않았는데 눈물을 흘렸다.

왜 세상이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하냐는

또 한번 억울함의 눈물이었다.



반 년 뒤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났을 땐

오히려 이전보다 좋아보였다. 다행이었다.

씩씩했고, 나름 담담했다 .

영정사진속 어머니는 누나와 정말 정말 닮으셨었다.


친인척이 별로 없어 운구할 사람이 부족해

밤을 꼴딱새고 누나의 어머니 운구를 도왔다.

그래도 운구할 사람이 부족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관이 가벼웠다.

수 십년간 두 딸을 홀로 키우며 짊어지셨을 삶의 무게에 비해

관은 너무 가벼웠다. 그래서 울었다.



화장터에 도착해 화장을 하고 유골함에 유골이 담기는 것을 보며

누나는 크게 "엄마. 잘가 고생했어" 라고 외치며 처음으로 울었다.


다시 버스에 타 누나의 아버지가 계신 용인공원으로 갔다.

유골함을 임시로 안치시키고 ,아버지 묘지를 방문하고

다시 돌아오는 내내 누나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헤어질 무렵

누나는 나에게 차비를 주며 담담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꾸밈없는 고맙다는 말이

내 인생에서 느낀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나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알게 된지 8년만에 처음으로

서로 흘린 눈물의 이유가 억울함이 아닌 날이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7-06 17:36)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2/21 16:3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수타군
18/02/21 16:33
수정 아이콘
눈물이 많은 요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8/02/21 16:4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뭔가 가슴이 찡하네요..
페스티
18/02/21 16:47
수정 아이콘
이렇게 감정을 움직이는 글을 읽고 조용필추신수 드립이나 떠올리는 저는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내 뇌를.. 아니. 스스로 자초한거죠.

어렷을 적에는 학철부어... 고사성어 만화속 붕어의 딱한 사정이 외면 당하는 걸 보면서 눈물을 쏟았었는데. 감정이 매마른 걸까요? 뉴스, SNS로 들려오는 타인의 단말마와도 닮은 절규에 익숙해져버린 걸까요. 붕어에 감정이입했던 아이는 이제 장황한 핑계를 대며 붕어를 외면했던 만화 속 장자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유머란 정전일 때 기습적으로 올라오는 만화도 좋지만 이런 마음 따뜻해지는 글도 좋네요. 감사합니다.
현직백수
18/02/21 16:51
수정 아이콘
세월과 환경이 만든...감정의 메마름이겠지만
아직까지 내 주변에 관해선 전부 말라버린건 아님을...
감사합니다
18/02/21 16:54
수정 아이콘
저 와이프와 처제도 장인 어른 화장할 때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푹 쉬세요' 라고 하더군요. 결국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해드리게 되는 말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나른한날
18/02/21 17:20
수정 아이콘
평범함으로 가슴을 저밀수 있게 하는 재능이 있으시네요. 만화도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아재개그도요.
진산월(陳山月)
18/02/21 17:24
수정 아이콘
아아 정말 좋은 글... ㅠㅠ
raindraw
18/02/21 17:4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ㅠㅠ
김철(33세,무적)
18/02/21 17:46
수정 아이콘
만화도 잘 그리시고, 글도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오쇼 라즈니쉬
18/02/21 18:07
수정 아이콘
감동적이고 좋은데 그림이 없네요
Multivitamin
18/02/21 18:12
수정 아이콘
담백한 글에도 글썽이는 눈팅러도 여기 있습니다. 잘 봤어요.
18/02/21 18: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억울한 일은 덜 겪으시길 바라요.
루크레티아
18/02/21 18:31
수정 아이콘
우리는 모두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살아가고 있죠.
은하영웅전설
18/02/21 19:18
수정 아이콘
눈물이 나네요.,
Cafe_Seokguram
18/02/21 19:28
수정 아이콘
간만에 외칩니다.

추게로!
윌모어
18/02/21 22:31
수정 아이콘
잔잔한 감동이 오네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Slip Away
18/02/21 23:02
수정 아이콘
참 가볍고 한없이 무겁네요.
간만에 야근하고 뒤늦게 한 끼 때울 순대국밥과 소주를 앞에 두고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 수고하셨습니다.
현직백수
18/02/21 23:07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환상의조합이네요!
저글링앞다리
18/02/21 23:0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안프로
18/02/21 23:14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환상적인? 그림솜씨에 가슴을 녹이는 글까지
백수님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날입니다 흐흐
현직백수
18/02/22 09:02
수정 아이콘
말그대로...백수입니다 ^...^
18/02/21 23:2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할러퀸
18/02/21 23:42
수정 아이콘
담담한 분위기와 문체가 맘을 더 저릿하게 만드네요..
에바 그린
18/02/22 01:14
수정 아이콘
제가 요 몇 년 새 피지알 분위기에 학을 떼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죠. 참 좋은 글을 써주시는 분들이 아직 계시다는거.

제 경험도 떠오르기도 하고.. 짧은 글이지만 많은 감정과 생각이 교차하네요.


매번 쓰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직백수
18/02/22 09:03
수정 아이콘
최고의칭찬이네요 감사합니다!
흑마법사
18/02/22 02:46
수정 아이콘
관이 가볍다는 말이 가슴을 울리네요. 저희 어머니도 작년 여름에 위암 초기진단 받으셔서 수술과 항암치료 받으시고 다행히도 현재는 거의 완치판정을 받으셨습니다. 항암치료 시작하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진다길래 삭발시켜 드리면서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내가 바로 빡빡이 엄마다! 라며 자폭개그를 하시지만 가장 힘든건 본인이었겠죠. 좋은 곳으로 가셨을겁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쌍둥이 여동생이셨던 작은이모 두분 다 위암으로 보내드렸던 사람으로서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암이란게 남의 얘기인줄만 알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더군요.
현직백수
18/02/22 09:02
수정 아이콘
울어도되나요...!
18/02/22 03:12
수정 아이콘
의리멋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반전여친
18/02/22 22:26
수정 아이콘
이런 동생을 둔 누나분이 부럽습니다
누나도 백수님도 잘될거예요
어머님은 좋은 곳에 계실거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8/07/07 21:07
수정 아이콘
짧은 글이지만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누구겠소
18/07/08 11:45
수정 아이콘
울컥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938 더 늦기 전에, 이미 늦어버린 은혜를 갚아야지. [10] 헥스밤12606 18/03/04 12606
2937 우울의 역사 [57] 삭제됨11843 18/03/02 11843
2936 억울할 때만 눈물을 흘리는 누나였다. [32] 현직백수19857 18/02/21 19857
2935 올림픽의 영향들 [50] 한종화16969 18/02/19 16969
2934 지금 갑니다, 당신의 주치의. (5) [22] 자몽쥬스8520 18/02/11 8520
2933 세상의 끝, 남극으로 떠나는 여정.01 [데이터 주의] [41] 로각좁9173 18/01/31 9173
2932 [알아둬도 쓸데없는 언어학 지식] 왜 미스터 '킴'이지? [43] 조이스틱11324 18/01/24 11324
2931 무쇠팬 vs 스테인레스팬 vs 코팅팬 [94] 육식매니아23600 18/01/22 23600
2930 역사를 보게 되는 내 자신의 관점 [38] 신불해15900 18/01/20 15900
2929 CPU 취약점 분석 - 멜트다운 [49] 나일레나일레14227 18/01/10 14227
2928 황금빛 내인생을 보다가 [14] 파란토마토10860 18/01/07 10860
2927 나는 왜 신파에도 불구하고 <1987>을 칭찬하는가? [76] 마스터충달10784 18/01/04 10784
2926 조기 축구회 포메이션 이야기 [93] 목화씨내놔17278 18/01/04 17278
2925 마지막 수업 [385] 쌀이없어요22712 17/12/18 22712
2924 삼국지 잊혀진 전쟁 - 하북 최강자전 [41] 신불해19398 17/12/15 19398
2923 [잡담] 피자 [29] 언뜻 유재석9659 17/12/14 9659
2922 군 장병은 왜 아픈가? [76] 여왕의심복12858 17/12/14 12858
2921 신경끄기의 기술 [27] 시드마이어32275 17/11/26 32275
2920 23박24일 전국일주여행 [38] 모모스201325489 17/11/21 25489
2919 인터넷에서 말도 안되는 역사 관련 헛소리가 퍼지는 흔한 광경 [36] 신불해36533 17/11/16 36533
2918 [공동 번역] 그 무엇도 총기 소유만큼 투표자를 갈라놓지 못했다. [26] OrBef18126 17/11/14 18126
2917 보고 계실거라 생각하는 당신들께. [238] Julia41056 17/11/13 41056
2916 [의학] 장기이식의 첫걸음 - 혈관문합술의 탄생 [32] 토니토니쵸파17614 17/11/08 1761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