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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8 02:25
보니 애초에 말도 다르고 혈통도 다른 외국인이 권력을 탈취해서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민중을 수탈해 댄 꼴인데
그냥 개인의 식민지냐 열강국가의 식민지냐의 차이지 국민국가의 근대화라는 거하곤 별 상관이 없는 전개 같네요-_-;
18/10/18 02:36
근데 진짜 다른거 떠나서 모든 가치요소를 배제하고 볼 때 정치능력 하나는 괴물이네요...
권력기반을 형성하고 특정 인간집단을 장악한다는 거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인데, 그걸 장악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수족으로 만들어서 자의적으로 부린다는거 정말 엄청난 능력인데 말이죠. 어저께 올리신 글에서 맘루크 숙청장면 정도만 보고도 절로 스탈린동지께서 하셨다는 "그 친구 대단해 정적은 그렇게 다뤄야지!" 라는 말이 떠올랐는데(저 말은 장검의 밤 사건을 보고 한 말) 그 뒤의 일들은 더 하군요. 메흐메트 알리의 일대기를 제대로 사용해야 할 사람들은 근대화를 꿈꾸는 리더들이 아니라, 권력장악의 비법을 알고 싶어하는 독재자들이어야 할 거 같습니다. 박정희가 메흐메트 알리의 비법을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정권과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듯
18/10/18 02:41
사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글을 읽고 궁금했던 부분은, 수백만명이 사는 광활한 일대국가에서 수백년동안 그 지역의 정치질서를 주도해온 집단, 세력이 일소되었을 때, 그 정치리더쉽의 공백이란게 어지간해서 메꿔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메흐메트 알리는 그 리더쉽을 무슨 수로 대체해 냈는지 그게 궁금하긴 했습니다.
오늘 글에 그에 대한 답이 어느정도 있는 듯.
18/10/18 06:05
본문의 내용 절대다수가 '메흐메드 알리, 칼레드 파흐미 저' 라는 책에서 인용한 내용인데, (책은 다소 한국인 입장에서 낯설수 있는 시대상을 다루면서도 꽤 쉽고 재밌고 그러면서 생각보다 자세한 편입니다)
그 책의 번역자 서평도, "번역하는 내내 메흐메드 알리의 폭압과 폭력에 전율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악한소설을 읽는듯한 재미가 있었다" 라는 평이 있었을 정도니, 뭔가 권모술수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흥미로운것 같습니다.
18/10/18 08:02
누구를 위한 근대화이며 누구를 위한 성장이냔 면에서 지금도 시사할 점이 많죠
그게 당시 사람들의 크나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후의 이집트 국민들의 생활에 이득을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기에 알리의 정책의 정당성을 논할 거리가 되었다는 것도요
18/10/18 10:43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대부분 다수 민중의 땀과 눈물과 피를 불러오는데 메흐메트 알리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네요.
18/10/18 11:32
그런데 전편 글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는데, 당시 중동의 오랜기간 패자였던 티무르의 영향력이 후계자들을 모아서 날려버린 것 만으로 일소가 될 수가 있던건가요?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면 티무르의 영향력이 반 무하메드 알리로 모아지고 방계나 살아남은 직계 쪽으로 모아져서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텐데 어떻게 한번에 쓸어버리는게 가능했던 건가요?
18/10/18 11:59
티무르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초기 이성계, 이방원 시절 중앙 아시아의 패자였던 인물이고, 메흐메드 알리가 맘루크를 척살한건 나폴레옹이 몰락하던 정도의 시기입니다.
티무르와 맘루크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뭔가 혼동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맘루크의 세력이 일소된건 애초에 맘루크가 무슨 거대한 통합된 단체가 아니라, 여러 지도자들이 난립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소 호족들의 난립을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런 상태에서 타격을 입으니 무엇을 구심점으로 뭉칠수도 없고, 메흐메드 알리가 그런 기회도 주지 않고 색출해서 잔당을 토벌하기도 했구요. 그나마 중심이 될만한 맘루크 거대 지도자가 없지는 않았는데, 모아놓고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전 메흐메드 알리와 전쟁하던 중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알리가 "이제야 이집트는 나에게 즐거운 곳이 되었다." 며 안심했다고 하니, 이 죽음이 알리에게 큰도움을 주었다고 할만합니다. 그 뒤 근소세력은 앞서 말했듯 회유하는척 하고 모아서 죽였고...
18/10/18 12:07
아이고 왜 맘루크를 티무르라고 머리속에 입력해 놨는지 모르겠네요.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먼저 머리를 없애고 후환이 더 없으니 불러놓고 다 죽여 버린거 엿던거군요
18/10/18 12:59
근대화도 이전에 어떤 상황이였냐가 이후에도 영향을 미치죠.일본은 본격적 개항이전에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으로 서구의 문물이 좋다는걸 지배층들이 이미 알았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있었으며 그 세력가들이 중앙정부를 엎어버렸을때 구심점으로 세울수있으면서 실권은 없던 덴노가 있었죠.
청나라는 서양의 문물중 쓸만한게 있다는거는 무역으로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아쉬워하지도 않았고 무역자체는 엄청난 흑자였고.. 이홍장같이 지방에 세력이 있는 군력자라도 해도 중앙에서 활동하고 싶어했지 중앙을 엎어버리고 싶어한건 아니고 황제를 엎어버리고 내세울 구심점도 없었죠.그렇다고 서테후나 황제가 스스로를 엎어 버릴리도 없고.그러다보니 낡은체제를 유지하며 전쟁을 하려고하니 국력을 모두 발휘할수가 없어 서양의 무기를 사는 정도로는 영국이나 일본에게도 이길수없는 나라가 되었고.. 조선은 체제를 엎어버릴수도 없고 서양과 교역을 한것도 아니니 힘들죠.경제력도 많이 모잘랐고... 이집트의 근대화 결론이 저리난것도 결국 이전의 상황이 영향을 미친거같네요.
18/10/18 17:01
뭐 조선이나 이집트라 근대화 초엽에는 서로 비슷하다고 보이는군요..본문에서의 제반조건이 같이 이집트 주민들은 조선에도 거의 같았다 할수가 있죠
그러면 일본은 왜 성공??...일본은 그 본질이 군국주의적 억압적 구조가 내재화된 사회이죠,,,, 그러니 백성들은 위에서 시키는대로 아무 저항도 불평 없이도 해냄니다 ..정권에 대항해 반란은 생각도 못하고 어지간한 고통 정도는 참아내고 하니 이런 나라가 급속한 개혁이나 발전 요구에 잘 순응을 하죠 글고보니 근대 일본하고 유사 체제가 하나 더 있네요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러시아 바로 소련이죠 다른 예를 역사상 찾아보니 법가적 통치 사상으로서 국력을 급속히 강화시켜 천하 통일 달성한 중국 고대 진나라가 되겠네요 ..결국에는 독재 없이는 근대화내지 국력 배양은 불가,,라고 하는 결론이 나옴니다
18/10/18 20:34
글쎄요...이집트는 대양도 아닌 지중해 건너에 유럽이 존재 하므로서 서구화의 필요를 일찍 받아들여 본문 같은 선진적 개혁이 시작되고한거라 지리적으로 유럽에 근접 한건 오히려 발전의 강력한 동기가 되죠..조선이나 일본이 이 지구에서 가장 늦게 서구 유럽 하고 군사적 충돌을 합니다..그러함에도 일본은 16 세기부터 유럽하고 교역을 하고한 나라이죠..대서양이나 인도양에 의해 동북아시아가 유럽하고 격리 되어 진것이 반대로 근대화에 방해물로 작용하고 한 검니다
18/10/18 20:12
소련 같은 경우는 이미 제정 러시아 시절 gdp가 세계 6위의 열강이였습니다. 스탈린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발전한것도 아니고 강대국을 더 강하게 한거니 맞는 예시는 아닌거 같군요.
일본의 경우 본인들이 잘하기도 했지만 주변 여건들이 굉장히 좋게 작용한 결과물이라 그런 결론을 내는건 좀 비약 같네요.
18/10/18 20:26
그건는 러시아는 국토 ,인구가 커서 경제력이 더 크고해도 후진적인 농업 국가 였죠..선진 공업국이 아님니다..재정러시아시절만 해도 농노 같은 전근대적 요소가 다분하고 한 중세적 국가체제인데 이조차도 피료르트 대제의 서구화로 그나마 근대화되서 군사력에서 서구수준에 따라간게죠,,짜르 같은 전제 군주 아니라면 그같은 서구화 발전시도 마저도 귀족들 방해로 ,농민들 무지로 실패로 가고 했을것 입니다
일본은 개국전에 유럽 열강들의 직접적 침입을 번 자체만의 힘으로 막아내고 한 전력이 있죠..일본이 특별하게 유럽측 외침을 피한다든가 하는 행운을 누리고 한 부분은 없습니다
18/10/18 20:42
스탈린이나 짜르나 독재적인 권력을 가졌는데 짜르는 근대화에 실패했고 스탈린은 성공했죠. 둘다 독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탈린이 성공해서 근대화에는 독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이상하죠. 동시대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근대화를 시도했고 성공한 경우가 몇 없는데 독재가 없어서인가요?
일본을 유럽과 거리가 있어서 이집트, 오스만 같이 간섭을 덜 받았고 뜯어먹을게 훨씬 많은 중국이 있어서 관심을 덜 받은게 행운이였죠.
18/10/18 20:56
그럴리가요..짜르가 서부 유럽을 추종해서 러시아에서 전근대성을 밀어내고 근대화에 성공한건 맞습니다...재정기 시절만 해도 러시아가 아무도 무시 못하는 유럽내 열강중 1국가 였던검니다..짜르시절 근대화는 그 당시 시기 인문적 .문물 기준에서 이고 전세계를 놓고 보아도 선진화된 사회란건 분명하죠..
그러한 연유로 영국 제외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이 이른바 [대육군] 을 끌고 원정을 감행 함해도 러시아 정복에 실패 했었던 것이고 말이죠 즉 다시말해 낙후한 후진 사회는 전제적 정권이 근대화 같은 나라 전체를 갈아 업는 대업을 성공시키는데 주요한 요소가 된다는거이 확실해 보입니다 메흐메드 알리가 똑똑하고 유능한 인물이란거가 단박에 증명이 되죠,,,, 독재화 통해 개인 권력을,그 기반을 단단히 하고 서구화, 근대화에 착수 한거니까요 조선하고 청나라를 놓고 보면 이 2나라는 내정에서 혼미를 거듭해서 내부 반란도 진압을 못하며 외세침략에 휘둘리고한 건 역사적 사실이죠 ....아 글고보니 유사 한 예가 프랑스에다 먹힌 베트남이 있군요..당시 베트남 왕조가 조선의 판박이 스러웠습니다
18/10/18 17:12
지금 이집투 인구가 7800명 이람니다..우리 남북한 합쳐진 인구가 7500만명 인데 조선말 시점 인구가 1600만에서 1800만명이거든요
19세기경 이집트 인구가 1000만명 이하가 되기는 어려울 검니다,,이집트는 나일강의 비옥한 델타 삼각주에서 소출 농업력을 고려하면 인구 부양력이 아주 높습니다
18/10/18 20:03
인도네시아가 비슷한시기에 별다른 외부 유립 없이 인구 300만에서 1억3천만으로 증가한거 보면 단순히 현대의 인구를 바탕으로 과거 인구를 판단하는거는 무리가 있는거 같네요. 근대에 들어서면서 의학발전, 농업생산량 증가로 인구가 늘어날 만한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의 높은 인구 밀도 때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서 인구가 많이 줄어드는 시점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적었다는게 딱히 이상하지는 않네요.
18/10/18 21:08
"....이 군대는 10년 동안 엄청나게 성장하여 13만 명이라는 노랄운 숫자에 달하게 된다. 인구가 500만 정도인데 군인이 13만 명이면 총인구의 약2.6%라는 뜻으로, 이는 군인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다는 뜻이다..' - 칼레드 파흐미 저, 메흐메트 알리 中
https://en.wikipedia.org/wiki/Demographics_of_Egypt 이집트의 인구는 1900년대 넘어 급속도로 증가한 것으로,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빈곤에 시달리던 지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올 무렵만 해도 이집트의 인구는 300만명 언저리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18/10/18 18:48
신불해님을 비롯한 pgr 작가분들의 진짜 능력은, 제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의 글을 끝까지 읽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18/10/19 10:44
한국에서는 반서구화, 반근대화에 대한 저항운동들이 반일 혹은 항일운동으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대화로 인해 개인의 삶이 좋아졌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대답이 항상 오묘해요. 특히 한국의 근대화라는 부분에 있어 '일본식민지 시대'보다는 '박정희 집권기'에 집중하는 탓에 더 괴상해지는 것 같구요. 둘을 연결지어 하나로 생각하는 역사학도 있긴 하지만... 으흠... 여하튼 근대화라는 것은 늘 다수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고, 본질적으로 특정 지배계층의 이득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다고 피지배계층에게 집중한다는 체제가 더 좋은 결과를 불렀냐하면 그건 아니었다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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